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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삶의 향기] 민화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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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미옥 문예평론가


나의 강의 후기에 호랑이 한 마리를 본 느낌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나는 조금 억울했는데 꿈틀거리는 눈썹 때문인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남자 형제들의 옷을 물려받은 나의 외모는 영락없는 사내아이였다. 단칸방에서 배운 것은 싸움의 기술과 딱지의 급소와 구슬 명중이었다. 동네 아줌마들은 수다를 떨다가도 나를 보면 “쟤가 딸이라네요!” 했다. 나는 눈을 치떠서 마음껏 어른들을 깔보아주었다. 눈썹 근육이 발달한 이유가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호랑이 눈썹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나를 ‘허당’이라고 불렀다. 자주 뭘 잃어버리거나 약속 장소를 착각했는데 긴장이 풀려서 그런 듯싶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일을 할 때 완벽함에 대한 강박증이 있다. 예민해지는 시간이 지나면 편안해지고 싶다. 불편한 관계를 기피하는 것도 꼿꼿하게 서 있는 신경을 눕히고 싶어서였다. 가능하면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려 한다.



민화, 민중의 소박한 삶 표출

해학적인 집단 정서 녹아있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담겨

중앙일보

[사진 가회민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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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내가 민화 속에 나오는 호랑이를 닮았다고 했다. 민화의 호랑이는 약간 멍청해 보인다. 용과 용맹을 겨루는 호랑이마저도 순한 표정이다. 민화의 매력은 자유분방이 아닌가. 용은 학과 연애해서 봉황을 낳고 말과 연애해서 기린을 낳았다. 봉황과 기린은 이복형제로 바람둥이 아비를 두었다. 민화엔 종을 뛰어넘는 해학이 담겨있다. 문자도도 글자와 그림이 연애해서 태어난 것 같다. 그러나 굵은 눈썹의 호랑이는 순수하게 존재한다.

내가 처음 만난 민화는 유년 시절 벽에 걸린 횃댓보였다. 벽을 가리던 천 위에 색실로 수놓아진 새와 꽃나무는 화조도였다. 금실 좋은 한 쌍의 새처럼 살라고 정성을 들인 염원이었을 것이다. 친구 집의 자개장롱 무늬는 십장생이었고 베갯모는 모란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내게 첫 민화의 기억은 손길이 자주 닿는 실생활이었다.

어린 날 시골 장터의 떠돌이 화가도 색색 물감을 늘여놓고 호랑이를 그렸다. 놀러 갔던 친구 집에는 형편에 따라 액자나 족자의 호랑이 그림이 걸려 있었다. 누가 그렸는지 모르지만, 재앙을 막고 복을 받으려는 벽사기복의 염원이었을 것이다. 온갖 재해와 질병에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복뿐이었다. 어서 이 환란이 내 곁을 스쳐 가기를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나는 민화의 약리도를 좋아해서 수험생 자식을 둔 지인들에게 자주 선물했다. 등용문의 잉어가 힘차게 뛰어오르는 그림은 그 옛날 자식의 과거급제를 염원했던 부모들이 선호하는 그림이었다. 나의 서재에는 서가도가 있는데 누운 책 옆에 문방사우와 백자나 화병이 있다. 모든 사물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민화는 서민만이 아니라 궁중과 양반네들의 삶에도 깊숙하게 들어갔다. 민중 속에서 발화된 민화가 계층이나 신분의 구별 없이 집단문화의 원형이 된 것이라 믿는다.

원래 민화의 우리 말은 속화(俗畵)였다. 광화문 철거를 반대했던 일본의 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처음으로 민화라고 불렀다.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이란 뜻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인 고유섭도 우리 미술을 “누천년 간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 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라고 했다.

세련된 유명 화가의 그림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 무명 화가의 민화다. 거칠어도 역동적이고 해학적인 집단의 정서가 녹아있다. 글을 몰라도 한눈에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민화는 민중의 기원이고 소박한 삶의 표출이었다. 외래문화가 침범해도 민화를 그리는 정신은 불변이었고 그 생명력은 기존의 관념을 뒤엎는 전복성이었다.

미술사를 깊게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민화의 특징을 무명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궁중이나 반가의 벽을 장식하는 화려한 채색화엔 관심이 없다. 예술에 대한 천성은 있으나 가난한 서민의 자식으로 태어난 어느 화공을 생각한다. 제도권에 들지 못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나 그랬기에 자유로웠다. 무엇을 그리든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민화에는 서명이 없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대단한 것 없는 장삼이사였다. 평범해지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호랑이 눈썹을 본다. 화가 나면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눈썹도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멍청하고 약간 부족해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크게 이룬 것도 없지만 잃을 것도 없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의 장점은 자유로움이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지점이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도도한 수묵화의 세상에서 이름 없는 채색화를 내는 것은 썩 괜찮은 일이다.

나이가 드니 나와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진다. 그러나 한 번씩 눈을 치뜨며 세상에 성질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다. 민화의 정신을 생각한다. 삶의 무사를 기원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유사하기 때문이리라.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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