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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금)

국가가 하지 않기에…15년째 교제살인 숫자 기록한 ‘분노의 게이지’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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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여성의전화 ‘분노의게이지’ 자원활동가들이 지난 19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교제폭력 보도 통계 분석 경험을 말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최지은씨, 박예림 팀장, 몽상(활동명), 혜린씨. 김송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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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 남성 서동하는 지난 8일 경북 구미에서 전에 교제했던 여성을 살해했다. 피해자 어머니에게도 흉기를 휘두른 그는 스토킹으로 세 차례 신고돼 교육도 받았다. 지난해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은 최소 138명, 이 중 17명은 경찰에 신고했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끝내 살해당했다.

‘138명’은 정부 공식 통계가 아니다. 경찰은 친밀한 관계의 남성이 살해한 여성이 몇 명인지 집계하지 않는다. 한국여성의전화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는 교제폭력으로 다치거나 숨진 여성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이들은 언론 보도를 통해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잠자는데 불을 켜서” 등의 이유로 여성을 살해한 교제살인 범죄자들을 하나하나 기록해왔다. 2009년부터 15년째인데 최소 1379명의 여성이 배우자 또는 연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집계됐다. 자녀·부모·친구 등 주변인의 피해를 더하면, 그리고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범죄를 더하면 피해자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25일 세계여성폭력추방의날을 앞두고 지난해에만 138명의 죽음을 일일이 기록한 분노의 게이지 작업팀을 지난 19일 만났다. 자원활동가 최지은씨·조경숙씨·혜린씨·몽상(활동명)을 비롯한 38명은 지난 1월 2023년 한 해 동안 웹에서 수집한 기사 수십만건을 기간별로 나눠 어떤 교제폭력 사건들이 있었는지 분석했다. 이날 만난 최씨 등 4명은 “얼마나 많은 여성이 죽었는지 그 이름들을 차마 기억조차 할 수 없다”며 “국가가 구조적 여성폭력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하나의 사건을 수십개의 기사로 접하면서, 이들은 우리 사회가 교제폭력을 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별 사건으로만 소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사건은 대개 자극적으로 다뤄지는데, 잠깐 지나면 잊혀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혜린씨는 “언론 보도가 자세해야 피·가해자 관계 등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독자 입장에선 범행 방법이 이리 구체적으로 노출돼야 하는지 고민될 정도로 자극적인 기사가 많다”고 했다. 또 “사건 직후 단신 기사는 쏟아지는데 실제 가해자가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까지 다루는 후속 기사는 많지 않았다”고 했다.

달라진 범죄 양상도 사건들을 예의주시하며 발견한 변화다. 4년째 자원활동에 참여한 최씨는 “최근엔 여성을 죽이고 자살하는 가해자가 늘어난 것 같다”며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식으로 ‘여자도 죽이고 나도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날로 심각해지는 교제폭력 범죄에도, 정부는 정확한 통계를 내지 않고 있다. 범죄 양태와 속성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마련할 기초임에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혜린씨는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가 15년째 나오는 동안 국가에서 그 누구도 이 작업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 분노한다”라고 말했다. 몽상은 “정확한 수치가 나오면 만연한 여성 혐오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발표하지 않는 걸까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경찰은 지난해 친밀한 관계의 폭력이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 규모를 집계했지만 피해자 성별을 구분해 내놓지는 않았다. 조씨는 “언론 보도만으론 정확한 전체 피해자 규모를 알 방법이 없어 답답하다”며 “정부에 ‘제발 일 좀 하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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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 감축 철회 촉구 공동행동과 242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지난해 10월30일 서울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서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 감축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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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확실한 처벌과 분명한 교육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최씨는 “평소 언행에서 드러나는 여성혐오를 사회가 제재하지 않아 전조증상들이 쌓이고, 결국 여성 살해에 이르는 것”이라며 “교제폭력은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두려움을 제도가 줘야 한다”라고 했다.

박예림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정책팀장은 “많은 사람이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이 심각한 범죄라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정작 폭력적 상대방과 관계를 끊는 것은 ‘개인적인 일’로 치부한다”면서 “젠더폭력은 이상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성차별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맞고 죽은 여성들을 기록하는 일’이 열심히 하면 할수록 힘이 빠지는 일이라고 했다. 최씨는 “여성들은 계속 죽고,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가해자들을 보면 무력감이 들 때도 있다”고 했다. 몽상은 “범죄의 참혹함을 강조한 자극적인 기사를 읽을 때 마음이 다치는 걸 피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분노는 이들의 힘이자 희망이다. 혜린씨는 “기록을 위해 모인 이들, 함께 화내는 이들과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희망도 든다”고 했다. 몽상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재판 방청연대를 하거나 분노의 게이지 작업을 하는 등 여러 연대 활동을 하는 것이 현실에 대한 분노를 풀어내는 방법”이라고 했다.

2024년 현황을 담은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는 내년 3월 발표될 예정이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오는 12월 중 작업에 함께 할 자원활동가들을 모집한다.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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