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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조용헌 살롱] [1471] 죽설헌의 새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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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가 되면 이순(耳順)이 된다고 했는데 나는 안 되는 것 같다.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가 더 많아진다. 왜 그럴까. 달관(達觀)이 안 된 탓이다. 그 대신 이역(耳逆)이 되어 갈수록 자연의 소리는 더 들어온다. 내 귀를 붙잡는 자연의 소리는 물소리와 새소리이다. 전남 나주의 과수원 지역 한가운데 있는 토종 정원인 죽설헌(竹雪軒)에 오랜만에 갔더니 새소리가 내 귀를 씻어준다.

텁텁한 입은 양치질로 헹구지만 때가 묻은 귀는 새소리가 씻어준다. 집주인 부부가 50년 가꾸어온 1만3000평의 죽설헌에는 주변에서 날아온 십여종의 새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자연의 소리는 새가 내는 소리이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산비둘기, 직박구리, 참새, 박새, 뱁새, 꿩, 까치, 물까치, 물오리, 원앙, 동박새, 왜가리 등이다. 영산강에 서식하는 고라니도 죽설헌 정원에 자주 출몰한다. 이 정원에 왜 새들이 많이 오는가? 주변은 배 과수원 지대인데, 여기에만 숲이 우거져 있기 때문이다. 새들에게는 오아시스이다. 특히 열매가 열리는 유실수가 많이 심어져 있다. 그 열매 따 먹으러 새들이 오는 것이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먹을 것이 있어야 꼬이는 법이다.

원예 고등학교를 나온 집주인이 심어놓은 유실수가 이 정원에는 많다. 배, 복숭아, 감, 밤, 자두, 앵두, 살구, 포리똥(왕보리수) 등이다. 동백꽃이 필 때는 그 꿀을 따 먹으려고 동박새가 등장한다. 열매가 열리는 시기도 각기 다르다. 계절이 순환하면서 그 열매 따 먹으러 온 새들의 소리도 로테이션이 된다. 주인집 부부가 차를 마시는 2층 방 유리창 너머로 감나무에 붉은 감이 매달려 있다. 까치 서너 마리가 내가 쳐다보는 시선을 일절 의식하지 않고 쪼아 먹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까치가 홍시감 쪼아 먹는 광경은 왜 내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 준단 말인가!

일본식 정원이 자연을 축소한 것이라면, 유럽식은 자연을 억압하였고, 한국식 토종 정원은 자연을 존중한 스타일이다. 죽설헌은 자연에 손을 안 대고 그대로 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정원이다. 돈 없는 서민이 만든 전라도 토종 정원이다. 사실은 손을 댔지만 언뜻 보기에는 손을 안 댄 것 같은 숲속의 분위기. 집주인은 이 자연스러운 느낌을 ‘자연 존중’이라고 개념화하였다. 이 대목에서 ‘도덕경’의 ‘도법자연(道法自然)’이 생각난다. 도는 자연을 본받고 배운다는 뜻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자연이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자연의 새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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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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