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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내가 옆에 있는 이상 너는 절대로 망할 수 없어” 복싱핑을 그리며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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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골 학교의 보조 교사다. 내 고객님들은 초등학생이며, 그중에서도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이다. 나는 그런 그들을 도와줄 충분한 능력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세상을 따라가기 어려워하는 어른이다. 나는 아침마다 분모와 분자를 모르는 5학년 친구 옆에 앉는다. 친구는 내가 오면 옆자리를 정돈하며 ‘내 선생님 왔다’라고 말한다. 내가 “이것이 분모고 이것이 분자야”라고 말한 뒤 “무엇이 분모라고?” 물으면 그는 웃는다. 그렇게 수줍게 웃는 얼굴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발그레한 볼이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것은 ‘모른다’라는 뜻이다. 서울 어딘가에는 유치원 때 이미 한글을 떼고 영어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있고, 충북 어딘가에는 5학년임에도 한글만 보면 속이 메스꺼워지는 아이가 있다.

‘정말 하고 시펏다’라는 문장을 ‘하고 싶었다’라고 고쳐줄 때 그는 비밀을 말하듯 속삭인다. “선생님, 저는 유튜버 할 거니까요.” 그럼 나는 말한다. “일단 분수를 알자.” 아이는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선생님, 망했어요. 제 인생은 이미 망했다고요.” 그 모습에 나는 전율한다. 서른한 살과 열두 살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사랑의 하츄핑’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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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수업 시간에 나만의 하츄핑 그리기를 했다. 아이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수백 가지 캐릭터로 부모들의 등골을 휘게 한다는 캐릭터가 학교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아이들은 유명 유튜버인 랄랄핑이나 레오제이핑을 그리거나 마이멜로디핑, 쿠로미핑을 그렸다. 친구는 말없이 종이만 노려보았다. “무얼 그리고 싶어?” 내가 묻자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나는 대답했다. “정말 좋은 생각이야.” 우리는 당장 가장 늠름하고 강해 보이는 복서의 사진을 한 장 찾았다. 친구가 물었다. “근데 망하면 어떡하죠?” 나는 그와 눈을 맞췄다.

“내가 옆에 있는 이상 너는 절대로 망할 수 없어.”

주문을 외우듯, 나는 연필로 연한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하츄핑의 머리를 감싸고도 남을 거대한 헤드기어를 그렸다. 친구 손엔 마커를 쥐여주었다. “이 선을 따라 그려봐.” 연필 선을 따라 아이의 선이 삐뚤빼뚤 이어진다. 뭉툭한 손에 맞는 복싱 글러브를 그려 넣으며 묻는다. “제일 좋아하는 색은?” 아이가 말한다. “파란색!” “머리 스타일은?” “짧게요!” 내가 산처럼 삐쭉삐쭉 솟은 스포츠 커트 머리를 그리면 아이는 짙은 파란색 크레파스로 색을 칠한다. “가슴엔 태극기를 그려줘.”

복싱핑의 작은 가슴에 찌그러진 태극 문양과 뒤틀린 건곤감리가 그려지고, 고민 끝에 눈은 파란색으로 칠하기로 한다. 거대한 눈 위에 짙은 파란색을 입히자, 복싱핑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아졌다. “얘 엄청 슬퍼 보여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우리의 복싱핑은 툭 치면 곧바로 쓰러질 것 같다. “망한 것 같아요.” 아이의 입술이 비쭉 내려간다. 그때 내가 말한다. “아니, 이 복싱핑은 사연을 가진 거야. 원수를 갚기 위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거야.” 그의 눈이 번쩍인다. “갑자기 엄청 세 보여요!” 반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와, 멋지다. 이거 네가 그린 거야? 선생님이 그린 거지?” 아이가 말한다. “선생님은 모자만 조금 도와주셨어.”

곧 모든 아이의 하츄핑이 반 뒤쪽에 모인다. 뭔가 단단히 사연이 있어 보이는 파란색 복싱핑이 눈에 띈다. 담임 선생님이 말한다. “이 친구가 만들기 시간에 결과물을 제출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네요.” 한 학년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 그는 나와 복싱핑을 그려서 반 아이들에게 박수를 받는다. 그가 무수한 과제들 앞에서 홀로 서성였을 시간이 스쳐 지나간다. 나도 함께 손뼉을 친다. 복싱을 하는 만화캐릭터를 그리는 능력만으로, 어떤 두 사람의 하루가 망하지 않았다면 꽤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 양다솔 작가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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