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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국극단 거처가 요정이 되다니..." 정년이 '원작 파괴' 결말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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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극스타 꿈꾸던 소녀, 팔려가듯 결혼
국극단 건물은 요정으로 바뀌는 엔딩
누리꾼들 "원작에 대한 예의 아냐"
전문가들 "시청자 수준 무시한 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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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정년이와 웹툰 정년이. tvN, 네이버웹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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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최고 시청률 16.5%를 기록하며 종영한 tvN 토일 드라마 '정년이'의 결말에 대해 원작 팬들을 중심으로 온라인상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탄탄한 여성 서사로 널리 사랑받았던 원작 웹툰의 취지와 드라마의 결말이 정반대라며 분노하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전문가들도 "제작진이 사회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퀴어와 페미니즘 등 원작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가치를 소거한 결과, 극 전체의 완성도가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웹툰 원작 주인공 '부용' 삭제... '퀴어 지우기' 논란


드라마 '정년이'는 목포 출신 천재 소리꾼 윤정년(김태리 역)이 대한민국 최고의 ‘매란국극단’에 입단해 국극 스타로 성장해 나가는 일대기를 통해 여성 예술인들의 꿈, 야망, 경쟁, 연대를 그려낸 작품이다. 1960년대 이후 사실상 명맥이 끊긴 '여성 국극'이라는 신선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데다, 김태리 신예은 정은채 라미란 등 다양한 세대의 여성 배우들이 각자 탁월한 연기를 보여주며 방영 내내 인기를 모았다.

웹툰의 인기가 대단했던 만큼, 드라마는 제작 단계에서부터 화제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정년 역에 어울리는 배우 1순위로 꼽혔던 김태리가 실제로 이 역할에 캐스팅되며 화제를 모았으나, 원작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캐릭터 '부용'이 삭제되면서 '퀴어 지우기'라는 비판이 빗발쳤다.

원작 설정상 부용은 정년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1호 팬'이자, 정년이 소리꾼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동반자 역할을 하는 인물로 정년과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극작가인 부용은 정년을 위해 쓴 작품 '쌍탑전설'을 무대에 올려, 정년이를 최고의 국극스타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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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웹툰 '정년이'에 등장하는 '부용'은 단순한 조력자를 넘어 극 진행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연이었다. 부용은 남성중심적인 예술계에서 자신의 창작품을 빼앗겨 온 여성 문인을 상징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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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인 감독은 씨네21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각색 과정에서 부용이는 사라졌지만, 부용이가 갖고 있던 정서는 (극중 영서, 주란 등) 다른 캐릭터에 녹여 내는 방식으로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고 밝혔다. tvN보다 앞서 드라마 정년이의 제작을 검토했던 MBC 관계자에 따르면 "원작 웹툰이 GL(Girl love, 여성 동성애) 소재라서 민감해 캐릭터 수정을 논의"했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마지막 회에 이르러 터진 '각색 리스크'


허술한 각색으로 인한 결함은 켜켜이 쌓이다 마지막 회에 이르러 폭발했다. 정년과 사실상 러브라인을 형성했던 주란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국극 배우란 직업을 포기하고 친어머니의 강요로 마치 팔려가듯 결혼을 하게 된다. 매란국극단 국극 연구생이 기거하며 함께 소리 연습을 하던 한옥은 요정(料亭)을 만들겠다는 이들에게 팔린다. 당시 요정은 남성 손님들이 여성 접대부의 시중을 받으며 고급 요리를 먹고 성매매 알선까지 이뤄지던 곳이었다. '쌍탑전설' 공연을 마지막으로 매란국극단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주인공 정년은 마당극 배우가 된다.

이처럼 여성들의 성장 서사가 사라진 드라마의 결말은 시청자들의 원성을 샀다. 원작에서는 부용이 주란처럼 결혼을 요구받지만, 결국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고 추후 정년과 재회한다. 부용이 쓴 작품 '쌍탑전설'은 널리 흥행하며 여성 국극의 '제2 전성기'를 불러오고, 정년, 영서, 주란 등이 국극 스타가 되는 등 여성 캐릭터들이 시대의 한계를 능동적으로 돌파하는 엔딩이 펼쳐진다. 웹툰 '정년이'의 스토리를 쓴 서이레 작가는 지난달 23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픽션 안에서라도 배우들이 노력의 보상을 받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 (여성 국극이 쇠퇴한) 현실과 다르게 명맥을 잘 잇는 상황으로 끝냈다"고 결말 의도를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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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02416440003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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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드라마 '정년이'의 마지막 방송 이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정리된 마지막 회 내용. 드라마 관련 게시판, 엑스(X) 등을 중심으로 정년이의 결말에 대한 원성이 빗발쳤다.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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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꾼들은 '원작을 모욕하는 결말’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부용을 삭제함으로써 모든 캐릭터가 망가져 원작과 정반대의 결말을 맞이했다" "가장 중요한 주춧돌을 뺐으니 서사가 무너질 수밖에" 등 허술해진 완성도에 쓴소리를 쏟아냈다. 한 누리꾼은 "웹툰을 드라마화한다는 건 원작의 팬들을 기본적으로 확보한다는 목적인데, 그렇다면 각색을 하더라도 원작의 주제 의식과 메시지는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며 "이럴 거면 '정년이'라는 웹툰을 가져와선 안 됐다"고 말했다.

퀴어 지우기뿐 아니라 "페미니즘 메시지도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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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 외에 드라마에서 삭제된 캐릭터가 하나 더 있다. '고 사장'이다. 극중 정년이에게 남역 연기의 디테일을 가르치는 고 사장은 젊은 여성이지만 가부장제와 성차별에 답답함을 느끼고 남자 복식을 하기 시작한다. 고 사장의 대사 세상은 거대한 여성국극 무대 같아, 사람들은 여자와 남자를 연기하며 살지는 팬들이 꼽는 이 작품 명대사 중 하나다. 실제 1920년대 강향란이란 여성이 남복을 하고 모자를 쓴 채 수업을 들었고 이후 많은 여성이 이를 따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버 웹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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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정년이가 퀴어 지우기를 넘어 '페미니즘 지우기'를 했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조혜영 문화평론가는 "부용은 여성 문인으로, 이름을 빼앗긴 채 남편의 유령 작가로 살았던 어머니와는 달리 자신의 이름을 지키며 국극 대본을 써내려가는 인물"이라며 "그런 부용을 없앴다는 건, 페미니즘적 맥락을 삭제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만약 감독의 말대로 주란이가 부용의 맥락을 이어받은 캐릭터라면, 결혼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어야 한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대중문화 비평집 ‘아니 근데 그게 맞아?’를 쓴 이진송 작가 역시 "원작의 주인공들은 가부장제 맥락에서 벗어나기 위한 분투를 하는데, 정작 드라마에선 당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시대적 한계가 전혀 묘사가 되지 않는다"면서 "부용, 고 사장처럼 페미니즘 서사를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인물들을 빼버렸으니, 사실상 원작의 메시지를 소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고 짚었다. 고 사장은 극중 정년이에게 남자 역할 연기를 가르치는 인물로, 젊은 여성이지만 가부장제와 성차별에 답답함을 느끼고 남자 복식을 한다. 이 작가는 마지막 회를 두고도 "어떤 천재가 타고난 재능으로 반짝 주목을 받다가 급격히 산화되어 버리는 이야기 정도로 납작해졌다"고 꼬집었다.

"시청자들의 콘텐츠 소화력을 과소평가한 결과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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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정년이'의 마지막 방송의 한 장면. tv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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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드라마 '정년이'의 각색 논란에 대해 "시청자들의 콘텐츠 소화력을 과소평가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이 작가는 "단지 논란이 될 만하다는 이유로 원작의 퀴어·페미니즘 코드를 삭제해 버린 건 회피에 불과하다"며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건 결국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아무리 생소한 퀴어 소재라 하더라도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 위에서 등장한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며 "대중적 취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21년 당시 방영된 tvN 토일 드라마 '마인'에서 배우 김서형은 자신의 정체성을 오래 숨기고 살아왔던 중년 레즈비언 캐릭터인 정서현을 연기하며 널리 호평을 받았다.

조 평론가는 세계적 콘텐츠 플랫폼의 흥행작을 예시로 들었다. 그는 "넷플릭스의 대표적인 성공작인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블랙'의 경우, 다양한 인종, 다양한 성정체성을 가진 여성 죄수들의 이야기였다"면서 "이런 해외 콘텐츠에 익숙해진 한국의 대중은 이미 그렇게 보수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오히려 원작의 설정들을 더 깊이 있게 해석했다면, 제작진의 역량이 더 돋보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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