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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윤정의 판앤펀] 여자들이 뭉치면,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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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


젊은 시절 ‘미녀 배우’의 대명사로 꼽히던 한가인이 유튜브 스타 랄랄(이명화)을 따라 아줌마 파마머리와 가는 눈썹을 그리고 60대 시골 여자로 변신했다. 그저 한번 웃기기 위해 만든 에피소드였겠지만 “평소 청순가련한 내 이미지가 답답했다”던 그가 낄낄대는 모습에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팬들도 “한가인도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라며 함께 즐거워했다.

여자들이 자신을 규정하는 틀을 깨고 나올 때 새로운 쾌감과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여자들의 이야기, 여자들의 콘텐트는 확실히 전진하고 있다. 드라마 ‘정년이’ ‘정숙한 세일즈’(사진)와 예능 ‘무쇠소녀단’을 번갈아 보던 지난 몇 달 동안은 풍부함을 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흐뭇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신데렐라도 팜므 파탈도 없었다. 아찔한 미모나 ‘섹시함’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자들이 뭉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정년이’ ‘정숙한 세일즈’ 등

기존 틀 깨고 새 가능성 제시

여자들의 도전과 연대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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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드라마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새로운 캐릭터로 풀어낸다. ‘정년이’는 잊혔던 여성 예술 장르 국극을 단지 이야기의 소재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심도 있게 재연해냈다. 여자들의 열정이 빚어내는 완성도 높은 국극 무대 장면들은 속이 뻥 뚫릴 만큼 새로운 감흥을 안겨주며 그 자체가 가장 돋보이는 주인공이 되었다. 여자들만 오롯이 모여 예술적 성취를 이뤄내는 드라마 속에서 여자들은 남자주인공의 사랑이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성장한다. 195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였을 여성 소리꾼과 여성 예술단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굽히지 않는 정년이는 씩씩하다. 여자들의 관계를 규정짓던 시기와 질투로 인한 깊은 갈등, 여성 캐릭터 하면 흔히 등장하는 순진무구한 희생자나 신경질적 마녀적 악녀 같은 전형성 대신 자신의 분야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열정이 더 두드러진다. 그 속에서 여성간의 애틋한 감정과 우정, 연대가 피어난다. 요정 집으로 팔려나간 국극단, 결혼이나 영화배우 등으로 소리꾼의 미래를 포기하는 맥없는 결말이 막판 시청자들을 화나게 했지만, 이전까지의 이야기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많은 성취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같은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 ‘서편제’(1993)에서는 한을 품은 소리꾼을 만들겠다며 아버지가 딸의 눈을 멀게 하는 약을 먹이고, 그 딸은 원망하지 않았다. 30여년 전이긴 하지만 이런 가학적인 남자-수동적인 객체로서의 여자 설정을 떠올린다면 이것은 큰 변화다.

좋은 드라마는 픽션 바깥의 현실도 변화시킨다. 놀라운 실력으로 국극을 재연해낸 김태리나 정은채, 신예은 등 배우들은 새로운 이미지의 문을 열었다. 시청자들은 현실 속 국극 무대를 보고 싶어하고 그 시절의 스타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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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정년이'의 극중 여성국극 '춘향전'에서 이 도령을 연기 중인 허영서 역의 신예은(왼쪽).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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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한 세일즈’ 역시 여자들이 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금기시되던 때 무려 성인용품을 판매한다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뤘다. ‘19금’의 용품이 등장했다는 파격보다 돋보이는 것은 그것을 팔기 위해 소개되는 욕망의 자연스러운 표출이다. ‘환상’ ‘쾌감’ 같은 용어들이 주인공 여성들의 대사로 혹은 불꽃놀이 같은 것으로 유쾌하게 표현된다. “샷다(셔터)내리기 전에는 장사는 계속되는 것”이라며 성공을 향해 포기하지 않는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 김소연을 중심으로 주변의 편견과 폭력들에 여자들이 힘을 합해 맞선다. 그 과정에 각자가 품고 있는 사연이 서로에 의해 보듬어지고 단단한 연대가 형성된다. 그 결과 캐릭터들은 “가로막으면 뛰어넘으면 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무쇠소녀단’은 여성의 육체를 새롭게 활용하는 모습을 보게 한 기분 좋은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이 분야에서 새 경지를 개척한 ‘골때리는 그녀들’이나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같은 쇼들 이후 여자들의 몸을 다룬 프로그램이 어떤 게 등장할지 궁금하던 차였다. 진서연, 유이, 설인아, 박주현은 무려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했다. 아마추어 선수 출신에 평소 운동하는 이미지로 다져진 여자들도 누구는 수영을 못 하고, 누구는 자전거를 못 타는 약점 한가지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들을 극복해내고 수영 사이클 달리기 모두를 완주해낸 여자들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수영장에 모인 여자들은 섹시한 수영복으로 몸을 노출하지 않고 검정색 반신 수영복을 입고 등장했다. 십여 년 전 데뷔할 무렵 ‘꿀벅지’라는 민망한 별명으로 불리던 유이가 이제는 쇼트 팬츠 아래 섹시한 허벅지가 아니라 멋지게 헤엄치는 건강한 팔과 다리,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며 걸음마부터 시작한 자전거로 엄청난 도전을 해내는 이미지로 기억될 듯해 통쾌함마저 느껴졌다. 철인 3종은 개인 종목이지만 이들은 입을 모아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더 느껴진다’고 말했다.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여자들의 새로운 연대의식, 앞으로 더 대중문화 속에서 보고 싶은 모습이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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