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국군과 함께 북진했던 ‘정훈공작연예대’ 이야기
작곡가 서영은의 동생인 코미디언 서영춘(1928~1986). /https://blog.naver.com/jungsh1793/120166323707 |
‘서영은’이란 분을 아십니까?
‘먼 그대’를 쓴 소설가 서영은, 걸그룹 케플러의 멤버 서영은을 아시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 쓰게 될 서영은(徐永恩·1927~1989)이란 분은 작곡가로서, 코미디언 서영춘의 형입니다. 이들 형제와 남매는 7남 4녀였는데, 서영춘의 동생 서영환과 서영수도 코미디언으로 활동했습니다. 서영춘의 늦둥이 딸이자 서영은의 조카가 개그우먼 서현선입니다.
서영은이 작곡한 대표적인 노래로는 오기택의 ‘고향무정’, 쟈니 리의 ‘뜨거운 안녕’, 유주용의 ‘부모’, 송춘희의 ‘진정이라면’,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폼’ 등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은 얼마 전 신문사를 방문한 한 노신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안평선(88) 전 KBS 춘천방송 총국장으로, 옛 동아방송(DBS)에서 1979년 일세를 풍미한 라디오 드라마 ‘창밖의 여자’를 연출했던 분입니다. 조용필의 노래 ‘창밖의 여자’가 바로 이 드라마의 주제곡이었습니다.
그는 제게 “더 늦기 전에 이 사연을 꼭 전해야겠다”고 했습니다. “1950년 6·25 전쟁 때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고 북으로 진격했죠.” 당시 시골로 피란 갔던 작곡가 박시춘이 상경하는 버스 안에서 곡을 구상하고 가사를 붙였다는 노래가 ‘전우여 잘 자라’였고, 이것이 서울 수복 축하공연에서 주제가처럼 불렸다고 합니다.
악극단에서 활동했던 작곡가 서영은은 이 무렵 적 치하 90일 동안 흩어져 있던 악극단 동료 10여 명을 다시 모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가수 이인권, 배우 이예춘(이덕화의 부친), 코미디언 우연이를 비롯해 연주인과 무용수였습니다.
1950년 정훈공작연예대 소속으로 국군과 함께 북진했던 배우 이예춘(왼쪽). 앞에 보이는 어린이는 이예춘의 아들 이덕화. |
“이제 국군이 북진을 합니다. 꿈에 그리던 통일이 곧 이뤄질 순간입니다. 우리도 가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서영은은 그들을 설득해 ‘정훈공작연예대’를 결성하고 국군 8사단 27연대에 편입해 국군과 함께 북진 대열에 올랐다고 합니다. 서영은은 이 연예대의 단장을 맡았습니다.
국군은 황해도 평야를 달려 평양에 입성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 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연설을 했습니다. 서영은의 종군 연예대는 국군과 함께 평안북도 희천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27연대장이 기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내일 만포진에 도착할 겁니다!”
환성이 터졌습니다. 만포진. 그곳은 바로 압록강과 인접한 곳입니다. 국토 끝까지 다다랐다는 건 통일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의미였습니다. 연대장은 “이제 만포진에서 압록강 기념 축화 회식을 마련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공연을 준비해 주세요.”
이때가 12월 초순이었습니다. 평안도의 겨울 날씨는 매섭게 추웠습니다. 연주와 행군에 녹초가 된 대원들은 만포진을 기대하며 깊은 잠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녘, 모두들 잠에서 깨 기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쾅!” “쾅!”
갑자기 포탄 터지는 소리와 폭격 소리가 온 세상을 부술 듯 요란하게 일어났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습격으로 부대가 포위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겁니다.
“긴급 후퇴! 후퇴!” 군인들은 대오를 갖춰 조직적으로 후퇴했지만 종군 연예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직 동 트기도 전이라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 밭으로 산으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대원들은 이렇게 다들 낙오돼 흩어졌습니다.
어느 정도 정신이 든 서영은은 대원들을 찾아 점검하려 했지만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바이올린 주자로 가수 금사향의 오빠인 최모, 여가수 주경선, 가수 이인권의 아내인 이순옥 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최모는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고 이순옥은 생사불명 상태가 됐다고 합니다. 서영은은 더 이상 수습할 겨를이 없어 남은 대원들과 함께 무작정 남쪽으로 걸었습니다. 그리고 1·4 후퇴 이후엔 각자 따로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전쟁 중 종군한 연예대는 여럿 있었으나, 이렇게 국군으로 따라 ‘북진’한 연예대는 이들이 사실상 유일했다는 것입니다.
15년의 세월이 흐른 1965년 봄에 동아방송 전속악단을 지휘하던 서영은은 동아방송 프로듀서였던 안평선씨에게 이 얘기를 들려 줬다고 합니다. 이 스토리는 작가 한운사씨가 대본을 써서 연속극으로 방송됐다고 합니다. 안평선씨는 “청취자들은 실화라기보다 드라마로 착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평선 전 동아일보 PD. /채널A |
“총 대신 악기와 노래로 부대에 편성돼 종군했던 그분들의 희생 역시 명예롭게 여겨져야 합니다.”
한운사 극본의 라디오 드라마는 지금은 소실돼 찾을 길이 없습니다. 다만 안평선씨가 전해 준 종군 연예대의 북진과 희생 이야기를 여기에나마 이렇게 적어 기록으로 남겨 두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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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은씨의 사진은 찾지 못해 제보를 부탁드렸는데 저희 독자센터의 김정형 전문위원이 1989년 3월 22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부고 기사를 찾아 주셨습니다. 기사에 ‘재일 작곡가’로 소개됐듯 1970년대 이후엔 일본 음반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일본에서 작곡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딸이 일본에서 가수 활동을 했다고도 합니다. 이 기사에 나온 사진이 현재로선 미디어에서 확인된 서영은씨의 유일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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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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