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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월가 투자금 14조원 날린 빌 황 징역 18년... 美는 금융범죄 엄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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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일 미국 뉴욕 남부연방지법은 한국계 헤지펀드 매니저 빌 황에게 징역 18년형을 선고했다./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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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일은 저에게 정말 힘겹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제가 그동안 봐 왔던 그 무엇보다 끔찍한 범죄(a dreadful crime)입니다.” 미국 뉴욕 남부연방지법 앨빈 헬러스타인 판사는 20일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재판장에 선 아케고스 캐피털 매니지먼트(이하 아케고스) 설립자인 빌 황(황성국)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판사는 이어 “피고에게 징역 18년 형을 선고한다”고 했다. 황씨는 체념한 듯 방청석에 앉은 배우자를 돌아보았다.

코로나 와중이었던 2021년 3월 월가(街)를 뒤흔들고 대형 투자은행을 파산 위기로 내몰았던 이른바 ‘아케고스(Archegos) 사태’가 이날 황씨에 대한 1심 판결로 일단 한 매듭을 지었다. 이 판결은 한국계인 황씨가 가족 자금 운용을 위해 설립한 회사 아케고스가 부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대형 은행들로부터 돈을 썼다가 주가 하락으로 이 돈을 갚지 못해 막대한 손실을 입힌 사건에 대해 내려졌다. 복잡한 파생금융상품을 활용해 돈을 빌리면서 담보로 제공한 주식의 가치를 실제보다 부풀려 은행들에 큰 손실을 입혔다고 검찰과 재판부는 판단했다. 이 사건으로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입은 손실은 100억달러(약 14조원)에 달한다. 이날 헬러스타인 판사는 황씨의 범죄를 투자자의 돈을 사실상 가로챈 가상 화폐 거래소 FTX의 설립자 샘 뱅크먼프리드에게 빗댔다. 그러면서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인에게 “무엇이 더 나쁜가. 뱅크먼프리드의 사기인가, 황의 사기인가”라고 다그치듯 물었다. 뱅크먼프리드는 지난 3월 25년 징역형과 피해자 보상을 위한 110억2000만달러 재산 몰수 명령을 받았다.

아케고스를 통해 70억달러 정도의 가족 자금을 굴리던 황씨는 주식 등 보유 자산을 담보로 은행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추가 수익을 내려고 시도했다. 그 과정에 복잡한 파생상품을 활용해 은행들로부터 과도하게 많은 돈을 빌려다 썼고, 결국 코로나 팬데믹과 미·중 갈등 등에 타격을 입어 투자한 주식들이 폭락하자 돈을 돌려주지 못하고 은행에 손실을 끼쳤다. 아케고스는 자체 자금의 일곱 배 수준이 넘는 약 500억달러를 은행으로부터 끌어다 투자했다고 알려졌다. 아케고스 사태로 노무라 20억달러, 크레디스위스 55억달러 등 많은 투자은행이 큰 손해를 입었고 크레디스위스는 그 여파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UBS에 합병됐다. 검찰은 “아케고스의 투자는 ‘카드로 만든 집(house of cards·사상누각)’과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황씨는 이날 아케고스 사태에 대해 “깊은 고통을 느꼈다”고 했다. 변호인 측은 ‘황씨의 자선 활동과 소박한 생활 방식’을 강조하며 4~5년형 정도로 형량을 낮춰줄 것을 제안했다. 헬러스타인 판사는 그러나 황씨 측의 변론을 들은 후 “완전히 터무니없다”고 말한 후 중형을 선고했다. 지난 15일 검찰이 구형한 형량은 징역 21년이었다. 검찰은 황씨를 기소하면서 “2012년에도 내부자 거래로 유죄를 받았던 전과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판사는 “그 점을 감안해 판결하겠다”고 했다. 황씨 측은 판결 후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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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하경


황씨는 백인 남성이 압도적으로 주류를 이루는 월가의 헤지펀드 가운데 보기 드문 한국계다. 고3 때 목사인 아버지와 선교사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갔고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대(UCLA), 카네기멜런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한 후 1990년 현대증권 뉴욕법인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조지 소로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월가의 거물 줄리언 로버트슨이 운용하던 ‘타이거 펀드’에서 일하며 로버트슨의 ‘천재 문하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2012년 내부자 정보를 이용한 중국계 은행 주식 거래로 홍콩과 미국 당국으로부터 벌금 4400만달러(약 615억원)의 철퇴를 맞았다. 절치부심한 끝에 그는 가족과 지인의 돈을 투자금으로 ‘아케고스’라는 펀드를 만들어 2020년 초 기준 약 70억달러를 굴리는 규모로 회사를 키웠지만 막대한 자금을 조달해 수익을 불리려는 과욕으로 결국 다시 한번 무너지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헬러스타인 판사의 판결에 대해 “비교적 무거운 선고”라고 평가했다. 잘못된 정보를 악용해 선량한 다수의 피해자에게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힌 경제 사범은 선처 없이 처벌하는 미국 사법부의 원칙을 반영한 판결이기도 하다.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가 가상 화폐 ‘테라·루나’가 안전하다고 허위로 주장했다가 가치가 폭락해 투자자들이 거액을 잃은 사건의 경우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낸 민사 소송을 통해서만 환수금 및 벌금으로 6조원 넘는 돈을 내기로 지난 6월 합의했고, 다수의 형사 소송을 통해 100년 이상의 징역형도 가능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2008년 금융 위기 때 폰지 사기가 드러난 버나드 메이도프(2021년 교도소에서 사망)의 경우 징역 150년형을 선고받았다. 경제 사범 최고 형량이 40년에 그치고, 현실에선 수년 형 정도 받는 일조차 드물어 ‘경제 사범에게 지나치게 너그럽다’는 지적이 나오는 한국과 대조된다.

◇아케고스 사태

아케고스는 월가(街)의 헤지퍼드 매니저 빌 황이 2013년 설립한 투자회사의 이름이다. 회사 이름은 그리스어로 ‘빛’ 혹은 ‘지도자’(신약에서 예수를 지칭)를 뜻한다. 원래는 자신과 가족, 가까운 지인들의 돈으로만 투자하는 가족 펀드였다. 2021년 빌 황은 글로벌 투자은행(IB)으로부터 500억 달러(약 70조 원)를 끌어 와 파생상품에 투자했지만, 주가 하락으로 인해 돈을 돌려주지 못해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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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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