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대학은 학위 논문심사가 한창이다. 논문심사의 절차는 어느 나라 어느 대학이든 유사하다. 복수의 심사위원이 필요하고 학과 외부인도 포함되어야 하는 등 요건을 가진다. 최종 판정을 위한 토론을 비공개로 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요즘은 최종 토론을 하기 전에 확인하는 것이 하나 있다. 심사를 받은 학생이 휴대전화나 노트북을 혹시 두고 나갔는지 보는 일이다.
만약 특정 발언이 문제시될 경우 절차적 신뢰가 깎이고 소모적인 논란에 휩싸일 수 있어서이다. ‘학생의 노력이 비밀 논의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은 불공정하다!’라는 말이 세를 얻고, 여기에 학생은 약자이고 투명한 것이 무조건 민주적이라는 믿음이 더해지면, 특정 절차가 애초에 왜 있는지 망각한 채 일시에 모든 논문심사를 공개하도록 바뀌는 것도 영 개연성 없는 일은 아니다.
서울의 한 대학교 의과대학 교내에 설치된 TV를 통해 학위논문심사 안내문이 나오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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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는 사회적 정보 거르는 장치
정보기술이 부른 제도 신뢰 붕괴
정보 포퓰리즘으로 공동체 위협
디지털 시민성 제고 노력이 필요
이 시나리오에서 생각해야 할 지점이 있다. 이런 논문심사 절차는 평가에 쓰이는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고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이다. 심사 관련자들의 깔끔한 의견 일치나 객관화가 어려우므로 주어진 한계 내에서 학술적 성과를 높이면서 모두가 승복하는 평가를 할 수 있도록 세월을 거치며 학계가 암묵적으로 합의해 만든 것이다.
심사 과정을 공개하면 자유로운 비판이 억제되고, 피심사자도 평가를 객관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거나 사소한 정보에 휘둘릴 수 있다. 정보는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관련성이 떨어지는 정보는 인간의 인식과 판단을 흐린다. 정보는 걸러지고 연결되고 꿰어져야 지식이 되는 법이다.
미디어 기술의 진화와 그에 따른 데이터의 폭증으로 인해 기존에 사회적으로 쓰이는 정보를 관리해왔던 제도나 절차에 대한 신뢰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사회제도의 대부분은 사실 들여다보면 사회적 결정을 하기 위해서 주어진 정보를 누가 어떻게 거르고 다룰 것인가와 관련한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법절차라고 할 수 있다. 사실에 대한 다툼이 있을 때 무엇을 증거로 인정할지 말지, 누구의 말을 채택할지 아닐지 등, 끝없는 정보의 바다에서 어떤 정보에 주목하고 어떤 것은 차단하여 결정에 이를 것인가에 관한 절차와 조건의 합이다. 가족을 이루어 자녀를 키우는 것도 정보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자녀 교육의 큰 부분 중 하나는 언제 어떻게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알려줄 것인지를 부모가 통제하는 일이다. 디지털 기기의 확산은 어린이와 어른 간 정보의 차이를 없앤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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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공개적으로 혹은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녹음, 녹화 더 나아가 딥페이크의 생성은 어떤가. 프라이버시를 없애고 사람들끼리의 접촉과 대화를 위축시킨다. 프라이버시의 소멸은 개성의 약화를 불러오고, 대화의 위축은 사회성의 축소로 이어져 공동체 유지와 인간성의 토대를 위협할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도 앞선 우리의 디지털 문화는 다양한 기회를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이것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사회적 영향도 피해갈 수만은 없다. 한 사회의 ‘미디어 리터러시’ 수준은 개인적 차원에서 기기 활용법을 익혀 자기 고양의 기회와 심리적 웰빙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숫자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정보가 반드시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신중하고 유보적인 자세가 우선 갖추어져야 한다.
소셜미디어, 플랫폼, AI 까지 기술적인 가능한 것들을 모두 활용하고 인간의 문화가 기술에 맞춰 적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유지해온 다양한 공공기관과 제도의 기반을 대안없이 무너뜨리고 있지는 않은지, 오히려 기술을 교묘히 활용하는 ‘꾼’들의 조작에 더 취약해져 가는 것은 아닌지, 미디어 기술과 이들이 만들어내는 정보의 흐름을 더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시민들의 민감도를 높여야 한다. 이것이 디지털 시민성 계발의 시작점이다. 디지털 강국답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미디어 기술의 명과 암을 모두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우리의 미디어 리터러시 논의나 교육은 앱의 활용법이나 가짜뉴스의 판별 정도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한 정치 브로커의 끝도 없는 녹음 파일이 쏟아지면서 지금껏 의혹에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장기전이 되면서 시민들의 정보 피로도가 높아졌지만, 우리가 소화해낸 정보의 양만큼 사건의 실체에 대한 이해에 다가갔는지 알 길이 없다. 공적인 목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걸러주었던 기관과 제도에 대한 신뢰는 끝도 없이 하락하고 있는데, 여기에 정보기술의 진화와 고도화는 더 많은 정보를 쏟아내면서 우리에게 전에 볼 수 없었던 도전을 가할 것이다. 이 두 조건의 협공 속에서 미디어 리터러시와 디지털 시민성의 수준을 올리지 못한다면 폭로 위에 또 다른 폭로가 덮치는 쓰나미를 맞으며 정보 포퓰리즘에 우리 사회는 계속 표류할지도 모른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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