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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 (목)

[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심화하는 북·러 밀착, 김정은-트럼프의 브로맨스는 끝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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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최선희 북한 외무상이 지난달 28일부터 9박10일 일정으로 러시아를 찾았다. 러시아 방문의 표면적 목적은 북·러 외교 장관의 첫 전략 대화였다. 양측이 지난 1일 진행한 전략 대화에서 어떤 논의를 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회의 직후 북한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이행하고, 주요 국제 문제들에 대한 의견 교환에서 현 국제 정세에 대한 쌍방의 평가가 일치했다”고 전했다. 또 대외 정책 기관들 사이의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국경일(4일)임에도 최 외무상을 대통령궁으로 초대해 1분여 동안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는 등 친밀감을 보였다.



북·러 첫 전략 대화, 친선 과시

푸틴은 휴일에도 최선희 면담

김정은, 하노이 회담 충격 여전

“제재 풀려면 대화밖에” 시각도

75년 만에 소환된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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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6월 30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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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 외무상의 러시아 방문 길에서 눈길을 끈 건 따로 있었다. 최선희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부 장관이 전략대화에 앞서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브역을 찾은 장면이다. 1949년 3월 3일 김일성 당시 내각 수상의 첫 러시아(옛 소련) 방문을 기념해 동판을 설치하고 제막한 행사였다. 김일성은 당시 스탈린 초상화를 자개로 조각한 꽃병을 비롯해 26종 39점의 선물을 열차에 싣고 스탈린을 찾았다. 김일성은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하고, 무기와 미화 4000만 달러(금가치 기준 현재 12억8000만 달러, 약 1조7815억원)의 차관, 북한 군 간부들의 소련 사관학교 위탁 교육 등의 군사협력을 약속했다. 당시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은 6·25전쟁을 위한 준비 차원이었는데, 이후 75년 동안 아무런 기념을 하지 않다가 이제서야 김일성 조명에 나선 것이다. 북한과 러시아의 최근 군사 협력이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대(代)를 잇는다는 점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보름 넘도록 미 대선 결과 침묵하는 북

북한은 최고지도자를 만난 사람을 ‘접견인’으로 부르며 특별 대우를 한다. 지난 5일 실시한 선거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1기 행정부 시절 김정은을 세 차례 만난 ‘접견인’이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정상회담이 불발된 뒤에도 두 사람은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과시했다. 이를 두고 ‘브로맨스’라는 표현도 나왔다. 트럼프 당선인은 이번 선거를 치르며 김정은과 개인적 친분을 내세웠고, 자신이 집권했을 때 미국을 향한 북한의 위협은 없었다고 자랑했다. 북한이 지난달 31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는데, 이를 두고 김정은이 트럼프 후보를 돕기 위한 목적이라거나, 트럼프 후보가 당선될 경우 북·미 간 직거래가 성사될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을 향한 북한의 반응이 아직은 차갑다. 2016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첫 당선 때는 열흘 만에 한국을 비난하는 노동신문 기사에 그의 당선 소식을 슬쩍 끼워 넣었지만, 이번에는 선거가 끝난 지 보름째인 20일 현재 북한은 침묵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에 대한 김정은의 속내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는 지난 15일 진행한 대대장 및 대대정치지도원 대회에 참석해 미국을 ‘미제’(미국 제국주의)로 칭하거나 “미국의 가장 적대적인 적수이며 가장 오랜 교전국인 우리 국가”라고 표현했다. 지난해 말 한국을 적으로 규정한 김정은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이후 미국을 적이라는 개념으로 언급한 것이다. 더구나 김정은은 이 자리에서 “핵무력을 중추로 하는 국가의 자위력을 한계 없이, 만족 없이, 부단히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미 대화를 통한 비핵화라는 서방의 기대에 끼얹은 찬물이다. 북한이 하노이 회담 결렬 뒤 “분명한 것은 미국이 이번에 황금 같은 기회(a golden opportunity)를 날려 버렸다는 것”이라던 당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주장이 ‘뻥카’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별장 앞마당을 미사일 발사장으로

북한은 올해 들어 극초음속 미사일과 순항미사일, 초대형 방사포 동시다발 발사 등 21차례의 미사일 공개발사에 나섰다. 이 가운데 1월 14일과 4월 2일 쏜 극초음속 미사일과 지난달 31일 발사한 화성-19형 미사일은 평양시 삼석구역에 있는 김정은 특각(별장)의 담 너머 공터에서 발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석구역의 특각은 북한의 최고사령부 벙커 인근에 골프장 3홀을 갖춘 북한 최고지도부의 휴양소로 알려져 있다. 극초음속 미사일은 음속의 5배 이상의 속도로 기동하며 요격을 피하고, 처음 선을 보인 화성-19형은 7687㎞ 고도까지 81분 56초를 비행해 역대 최장 비행기록을 세웠다. 김정은이 미국을 향한 무력시위를 자신의 특각 앞마당에서 실시한 셈이다. 대놓고 미국을 위협하는 특각에서 미사일을 쏠 땐 김주애로 알려진 딸도 동행했다. 결과적으로 최근 북한의 움직임은 러시아와의 밀착에 선대 김일성을 소환하고, 미국을 향한 대립각에 다음 세대의 상징인 딸을 동원한 셈이다.

김 위원장은 자신이 야심 차게 나섰던 하노이 회담의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미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대북 제재 완화를 시도하다 좌절을 맛본 뒤 큰 물줄기를 러시아로 돌린 게 이를 보여준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와 브로맨스 회복에 나서기보다는 당분간 러시아를 향한 손짓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러시아와 밀착함으로써 미국·중국이 시샘하기를 바랄 수 있다. 어쩌면 김정은은 트럼프 당선인과 개인적인 친분과는 별개로, 자신이 하노이에서 당한 ‘수모’를 철저히 ‘계산’(되갚음)하려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전쟁으로 국제 질서가 재편하는 분위기지만, 전쟁이 끝나면 다음 순서는 북한이다. 최근 이란이 제재를 피하기 위해 고농축우라늄 생산을 중단하겠다는 뜻을 국제원자력기구에 밝혔다고 한다. 트럼프 폭풍을 우려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북한으로서도 정답은 트럼프 당선인과 철저한 ‘계산’이 아닌 브로맨스 회복을 통한 대북 제재 해제다. 내년 1월 취임하는 트럼프 당선인에게도, 김 위원장에게도 시간은 4년뿐이다.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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