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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월)

“생존 기지촌 여성과 그 후손들 위해”···국가폭력 기억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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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책 <전쟁 같은 맛>의 저자 그레이스 M. 조 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대학 사회학·인류학 교수가 지난 13기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건물 인근 철거 저지 농성장을 찾아 시민들과 대화하고 있다.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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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M 조 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대학 사회학·인류학 교수는 미군 기지촌 여성의 후손이다. 지난해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책 <전쟁 같은 맛>(글항아리)은 한국전쟁과 기지촌 생활, 미국 이민과 조현병을 살아낸 어머니 ‘군자’의 생애를 담고 있다. 조 교수는 지난 13일 어머니와 비슷한 삶을 살아낸 여성들이 머물렀을 경기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가 철거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철거 저지 농성장을 찾았다. 그는 “살아남은 기지촌 여성들과 그 후손들은 아직 정의를 찾고 있다”며 “그들을 위해서라도 철거 대신 아픈 역사를 기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만난 조 교수는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건물을 보자마자 ‘감옥’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는 “여성들의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감옥에 가까웠다”며 “철조망이 쳐진 탓에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는데 사람들이 그 안을 보며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노력을 막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성병관리소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정부가 미군기지 인근에서 이뤄지는 여성들의 성매매를 조장·방조해온 흔적이다. 정부는 성병 치료라는 명목으로 이곳에 여성들을 강제 수용했다. 여성들이 철창 안에 갇힌 원숭이 신세라는 뜻에서 ‘몽키하우스’라고도 불렸다. 동두천시는 이 일대를 소요산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건물을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조 교수는 성병관리소 철거는 단순히 국가폭력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역사를 지우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가는 폭력과 부정의를 토대로 세워지기 마련이지만 그로 인한 피해자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그렇기에 또 다른 폭력이 반복되는 것”이라며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최근 동두천시 관계자들이 언론 기고를 통해 “성병관리소는 수치의 상징”이라며 “더는 아이들이 어두운 역사를 마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 자체로 또 다른 폭력이라고 꼬집었다. 조 교수는 “기지촌이 ‘수치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껏 정부가 국가폭력을 인정해오지 않던 기조와 일관적”이라며 “기지촌 여성들에게 가해진 구조적 폭력 위에 더해진 ‘상징적 폭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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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시 낙검자 수용소 2층 방의 창문 쇠창살 너머로 감시초소가 보인다. ‘달러를 버는 애국자’로 추켜세우던 정부는 그 일을 수행할 수 없는 여성들의 신체를 감금했다. 김창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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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교수는 어머니 개인사를 통해 아픈 과거를 직시해야 하는 이유를 느꼈다고 했다. 그는 23세 때 조현병을 겪던 어머니가 미국 이민 전 한국의 기지촌에서 일하며 아버지를 만난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조 교수는 “어머니가 자신의 삶에 대해 거짓말을 해온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며 “어머니가 조현병으로 큰 고통에 시달린 배경에는 기지촌에서 일했던 트라우마가 있었음을 그제야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의 삶을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충격을 보듬었다고 했다. 조 교수는 “어머니의 과거를 알게 된 뒤 어머니가 겪었을 트라우마를 공유할 수 있게 되니 고통스러웠다”면서 “어머니가 기지촌 여성이 된 것이 개인적 선택으로 일어난 상황이 아니라 일본 식민지배부터 한국전쟁, 미군 정주 등 여러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답할 때 더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조 교수는 성병관리소 철거를 둘러싼 논쟁이 사회가 불편한 과거를 어떻게 직면할지 논의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 그는 “논의하는 연습을 미리 해두지 않으면 앞으로 불거질 여러 역사적 문제에 끊임없이 망연자실하거나 제대로 대처하는 방법을 모른 채 살아가게 될 것”이라며 “한 세대가 말하지 않는 비밀은 다음 세대로 전유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억눌린 트라우마는 또 다른 트라우마를 낳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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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쟁 같은 맛>의 저자 그레이스 M. 조 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대학 사회학·인류학 교수(왼쪽에서 아홉번째)가 지난 13일 경기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건물 인근 철거 저지 농성장을 찾아 농성 중인 시민들을 만났다.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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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은 맛>의 한국어판 서문엔 국가가 미군 기지촌 성매매를 관리·조장했다고 인정한 2022년 대법원 판결을 언급하며 “(기지촌) 여성들을 온전한 성원으로 인정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이들에게 보상할 준비가 됐다는 신호이길 바란다”고 적었다. 국가폭력은 인정됐지만 국가의 사과와 반성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장소가 사라지면 기억도 더 쉽게 사라질지 모른다.

조 교수는 기지촌 역사가 과거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가가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지만 비자발적으로 희생해야 했던 기지촌 여성들은 왜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과거의 실수에서 배워야만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누가 왜, 여성 착취의 역사를 지우려 하는가
https://www.khan.co.kr/national/incident/article/202410200900021



☞ ‘미군 위안부’ 그 때는 애국이고, 지금은 수치인가 [플랫]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10151100011



☞ [책과 삶]‘타락한 여자’로 손가락질 당했지만 명예로운 삶을 산 엄마를 기록하다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306231354001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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