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 전 한국연금학회장) |
미국 연금과 의료보장에 대한 실증분석을 주제로 학위를 취득한 해에 IMF 경제위기를 맞았다. 1997년 5월 학위 수여식 후 7월부터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연구를 시작한 필자는 몇 달 후 국가부도 사태를 겪었다.
구조조정 칼자루를 쥔 IMF에 관심이 몰렸을 때, 필자는 더 가까이서 경제 주권을 상실한 국가의 서러움을 목도했다. 달러를 빌리기 위한 정부의 처절한 노력을 봐서다. 당시 세계은행이 주도한 구조조정차관(SAL) 30억 달러를 위한 재정 당국의 절박했던 노력 말이다. 나라 곳간을 책임진 재경부가 세계은행이 원하는 기관의 방문 일정을 조율했다. 필자 소속 한국보건사회연구원도 방문 대상이었다. 노후소득보장제도 재구조화를 담은 백서 발간이 구조조정 차관 제공 조건에 포함되어서다.
당시 연금 분야의 세계은행 소통 창구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었다. 세계은행 연금팀장이던 로버트 홀츠만(현 오스트리아 중앙은행 총재) 등으로 구성된 세계은행 연금팀이 요구했던 5개 연금과제 중 하나를 1999년부터 필자가 수행했다. 2000년 10월 12∼13일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국제 콘퍼런스에서 세계은행은 그 5개 과제 중 필자 수행 과제만을 제본해 현장에서 배포했다. 그 자료가 'Generational Accounting for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Public Pension Schemes'이다. 세대 간 형평성 차원에서 한국 연금제도에 큰 문제가 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 중 일부가 'OECD Economic Surveys: Korea 2001'의 112쪽(Figure 36. Transfers between generations under the current system)에 수록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1999년 6월 14∼25일 하버드대학에서 개최된 'The HIID-WBI Workshop on Pension Systems in Crisis'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버드대학과 세계은행 공동 주최 워크숍에서 세계은행 홀츠만 팀장의 발표 자료에는 주요 국가 연금 부채 비교표가 있다. 필자의 '공적연금의 현황과 문제점(보건복지포럼 1999년 11월)'에 그 내용이 있다. 이런 영향 등으로 2007년 국민연금 개혁에서는 연금 부채 개념을 많이 활용했다.
문제는 이후 우리 연금 논의가 퇴보에 퇴보를 거듭했다는 점이다. "2018년 4차 재정계산부터 기금소진 시점 몇 년 연장되는 것을 재정안정방안이라 하고 있다.…소득대체율을 50%로 상향 조정하고 보험료율을 12%까지 올리면 기금 소진 시점이 몇 년 연장되나, 이미 발생한 775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 누적적자는 1440조원이나 더 늘어난다.…그러니 재정안정방안이라며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만을 제시하는 것은 국민에게 사기를 치는 것과 같다." '5차 재정계산위원회 회의록'의 17차 회의(2023년 6월 23일)에서 필자 발언 내용이다(606∼609쪽).
이는 5차 재정계산위원회가 끝날 때까지도 국민연금 누적적자와 미적립부채 공개를 반대했던 위원회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1999년 세계은행과 하버드대학 워크숍에서 사용한 미적립부채 외에, 재정 추계만 하면 산출되는 누적적자마저 공개하지 못하겠다는 위원회 결정에 대한 항의 발언이었다. 결국 위원회는 기금 소진 시점 몇 년 연장되는 것만 재정안정방안이라고 공청회에서 발표했다.
정보 제공 등에서 너무도 문제가 많은 공론화위원회 시민대표단 결정을 따르라는 야당과 이해관계자들 주장으로 22대 국회는 아직 연금 개혁 논의를 시작조차도 못 했다. 연금연구회 전영준 한양대 교수 추정에 따르면, 시민대표단이 선호한 '소득대체율 50%-보험료율 13%'는 2023년 1825조원인 미적립 부채가 2050년에 7700조원(GDP 대비 138.8%)으로 급증한다. 지난 5월 다행히도 법 통과가 무산된 '소득대체율 44%-보험료율 13%' 역시 2050년 미적립부채가 6366조원(GDP 대비 123.2%)으로 급증한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기금소진 시점 몇 년 연장을 들어 여전히 재정안정방안이라 호도하고 있다.
최기홍 서울대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이 강조해 온 내용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사실상 무한기간을 재정평가 기준으로 삼는다. '지속 가능한 지불능력(Sustainable Solvency)'을 통해서다." 2024년 5월 의회에 제출된 미국의 연금 재정추계 보고서가 이를 뒷받침한다. "재정추계기간인 75년 후, 즉 2100년 말의 연금 적립배율(2100년도 말의 1년 연금 지출액 대비 보유한 연금 적립금 비율)이 양수이면서, 동시에 이 비율이 안정적이거나 더 증가해야 한다." 이는 사실상 무한기간으로 국민연금 재정안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은 12.4%를 부담하며 39.1%의 연금 소득대체율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속 불가능하다고 빨리 소득대체율은 내리고 부담수준을 올리라고 권고한다. 그래야 여러 세대의 고통 분담이 가능해서다. 그런데 '현재 미국 수준인 13%로 보험료를 인상하면서 소득대체율도 44%로 올리자'는 게 지난 5월 야당이 했다는 통이 큰 양보였다. 그러니 필자가 "재정안정방안이라며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 조합만을 제시하는 것은 국민에게 사기를 치는 것과 같다"고 강조하는 거다. MZ세대 47%가 국민연금 폐지를 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정보를 공개하며 논의하되, 창조적으로 적기에 연금제도를 개혁하면, 미래 세대의 노후도 보장할 수가 있다(With informed discussion, creative thinking, and timely legislative action, Social Security can continue to protect future generations. 28쪽)". 2024년 미국 연금 재정추계 보고서의 결론이다. 개혁으로 포장해 국민연금을 개악한다면 다시는 회복하기가 어렵다. 국민연금보다 상황이 훨씬 나쁜 공무원연금과 사학연금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모든 정보를 공개하면서 개혁 논의를 진행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해야 '망국으로 향하는 고속열차'를 멈출 수 있다.
윤석명 (보건사회硏 명예연구위원, 전 한국연금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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