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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한겨울 흰눈 속, 붉은꽃 초록잎의 화려한 자태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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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 꽃. 자생종인 동백나무는 꽃잎이 중간쯤만 벌어지고, 질 때 한 송이가 통째로 떨어진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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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고 있는 수목원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지리적으로는 충남 태안 바닷가 옆에 자리한 59만5천㎡(18만 평) 규모의 공간일 것이다. 그 중 약 6만6천㎡(2만 평)는 1년 내내 일반 탐방객에게 공개되는 공간이고, 나머지 약 52만9천㎡(16만 평)는 연구·교육 중심의 비공개 지역으로 축제 등 특수한 기간에만 제한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수목원의 지리적 한계를 넓히는 활동이 바로 수목원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연구·보전·교육·문화 활동이다. 수목원은 지자체 및 기업과 협력하여 멸종위기식물을 보전하고, 초등학생, 장애인, 취약계층 등 다양한 탐방객을 초대해 숲 체험 교육을 진행하기도 한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도록 기획된 수목원의 다양한 공익 활동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궁극적으로 수목원의 지리적 경계를 뛰어넘는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만한 나무가 바로 10월 말부터 개화해 한겨울 화려한 자태를 선보이는 동백나무다.







코코 샤넬 ‘한 계절 앞선 꽃, 매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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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동백나무. 도입종인 애기동백나무는 꽃잎이 활짝 벌어져 있고,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며 지는 것이 특징이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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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는 차나무과 동백나무속에 속하는 상록수로, 대한민국 남부와 일본, 중국에 자생한다. 종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빠르면 10월, 늦게는 5월까지 오랜 기간 꽃을 피워 자칫 황량해 보일 수 있는 겨울 정원을 환하게 밝히는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화려한 꽃만큼이나 가죽질의 두꺼운 잎도 매력적이다. 한겨울 소복이 쌓인 흰 눈과 대비되는 붉은 꽃잎과 초록 이파리는 그 자체로 완벽한 설경을 만든다.



대부분의 자연 이치가 그렇듯 나무가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궁극적인 목표도 종자 생산과 번식이다. 꽃가루받이를 해줄 곤충을 만나기 위해 대부분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와는 달리, 동백나무는 한겨울에 꽃을 피운다. 그래도 괜찮다. 동백꽃은 대표적인 조매화(새를 통해 꽃가루받이가 이뤄지는 꽃)이기 때문이다. 동박새, 직박구리 등 한겨울 먹이가 부족한 새들은 동백꽃의 꿀을 빨아 먹고 꽃가루를 옮긴다. 동백꽃과 공생관계를 이뤄 이름도 동박새라고 불리는 이 새는 2월의 화투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아시아 원산인 동백나무는 대항해시대 차나무의 전파와 역사를 같이 한다. 재미있게도 차나무와 동백나무는 같은 차나무과 동백나무속에 속하는 식물이다. 중국의 차 문화는 17세기 중반 유럽으로 수입되면서 유럽의 대표적인 귀족 문화로 자리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백나무도 유럽으로 도입되어 관상용 나무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동백꽃은 명품 브랜드 ‘샤넬’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꽃인데, 설립자인 코코 샤넬은 동백꽃의 미덕에 대해 ‘다른 꽃보다 언제나 한 계절 앞서 있는 꽃으로, 푸른 빛을 잃지 않아 어떤 나이에도 매혹적인 모습을 지켜낸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수목원에서 볼 수 있는 동백나무는 크게 동백나무와 도입종인 애기동백나무, 그리고 그 둘의 교잡종으로 나뉜다. 자생종인 동백나무는 꽃잎이 중간쯤만 벌어지고, 도입종인 애기동백나무는 활짝 벌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백꽃은 한 송이가 통째로 떨어지지만, 애기동백꽃은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며 지는 점도 다르다.



설립 연도인 1970년부터 동백나무를 도입한 천리포수목원은 199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다양한 품종의 동백나무를 식재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집한 동백나무는 1096 분류군에 이른다. 동백나무는 물 빠짐이 좋으면서도 어느 정도 습한 반그늘의 환경을 좋아하는데, 때문에 햇빛을 많이 받는 남사면보다는 북동사면, 북서사면에서 훨씬 잘 자란다. 수목원 바닷가와 맞닿아있는 경계 사면에 동백나무원이 조성된 이유도 바로 옆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조성된 곰솔이 적당한 그늘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앞서 수목원의 영향력을 확장한 대표적인 나무로 동백나무를 꼽은 이유가 있다. 동백나무는 주로 남쪽 지방에 자생한다고 하지만, 해양성 기후 덕분에 비교적 온난한 겨울을 보내는 서쪽의 대청도, 동쪽의 울릉도에서도 자생하기 때문에 유(U)자형 분포 곡선을 그리곤 한다. 이 분포에 걸맞게 충남 태안군의 군화 역시 동백꽃이다.







30년간 수목원 묘목 30만주 곳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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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7일 천리포수목원에서 가드너들이 동백나무 묘목을 심고 있는 모습. 천리포수목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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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수목원에서 11㎞ 정도 떨어진 태안 근흥면 두야2리 주민들은 ‘동백회’를 결성했다. ‘태안군의 군화가 동백꽃인데, 마을에 제대로 된 동백나무가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어 동백나무를 키우고 나누기 위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당시 천리포수목원 민병갈 설립자는 주민들을 돕기 위해 수목원에서 키운 동백나무 삽수를 무료로 나누는 한편, 다양한 동백나무 품종 리스트와 재배 기술을 주민들과 공유했다.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동백회가 지난 30년간 기관, 단체, 가정에 기증한 동백나무 묘목이 약 30만 주에 이른다. 수목원의 역사를 품은 동백나무가 지역 주민의 노력에 힘입어 태안 곳곳에 뿌리를 내린 셈이다. 지금도 동백나무를 심지 않은 집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인 두야2리의 애향가에도 동백나무가 등장한다. ‘동백꽃 무궁화꽃 번갈아 피고 /앞 들녘에 오곡백과 철 따라 익어가네.’



“초록과 바다와 책이 다 있어서 너무 좋았고, 생태계를 아끼고 가꾸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마음이 따뜻했어요.” 지난 10월 열린 북페어 ‘2024 천리포수목원 책바슴’ 참가자의 후기 중 하나다. 충남 사투리로 추수를 의미하는 ‘바슴’에서 따와 ‘가을철 곡식도 걷고, 마음의 양식인 책도 수확하자’는 취지로 열린 행사였다. 전국의 다양한 제작자가 참여해 시중 서점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재미있는 서적을 소개하고, 정세랑 작가의 북토크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진행됐다.



한쪽에서는 파도가 치고, 한쪽에서는 억새가 살랑이는 책바슴의 풍경 속에서 30년 전 동백회를 결성한 태안군 주민들의 증언을 떠올렸다. 동백나무 보급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했던 수목원의 노력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계승되고 있다. 그건 보전·교육·연구 활동으로 생물다양성을 지켜온 본연의 역할이기도 하고, 인구 6만의 소도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북페어를 개최하는 일이기도 하다. 생각지도 못한 기획을 통해 수목원의 영향력은 59만5천㎡라는 지리적 한계에서 벗어나 지역에 뿌리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겨울 동백꽃잎만큼이나 진한 색깔로 지역 곳곳을 물들일 것이라 믿는다.



황금비 나무의사



한겨레 기자로, 콘텐츠 기업 홍보팀 직원으로 일했다. 말 없는 나무가 좋아서 나무의사 자격증을 땄고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천리포수목원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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