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인척들이 모이는 돌잔치가 사라지는 대신 다소 낯선 이름의 파티를 즐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젊은 예비 부부 사이에서 아기의 성별을 공개하는 ‘젠더리빌 파티’가 유행하고 있다. pexel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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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인척과 지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왁자지껄한 돌잔치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결혼식에 이어 경조사비용이 가중되는 행사다 보니 ‘돌잔치 초대는 민폐’라는 인식도 늘고 있다. 이제 백일잔치와 돌잔치는 직계가족만 모여 간소하게 식사 한 끼를 한다든지 아예 하지 않는 가정도 있다. 돌잔치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다소 낯선 이름의 ‘신종’ 파티들이다. 과거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브라이덜 샤워(결혼 축하 파티), 베이비 샤워(예비엄마에게 출산 준비물이나 신생아 용품을 선물하는 파티)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젠더리빌’(성별 공개) 파티가 그것이다.
배우 윤진이씨가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젠더리빌 파티 현장을 공개했다. SBS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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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BS 예능 프로그램 <동상이몽2 - 너는 내 운명>에는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둔 배우 윤진이씨의 젠더리빌 파티 장면이 방송됐다. 그는 친한 친구들과 남편이 꾸며준 젠더리빌 파티를 즐겼다. 여기엔 트렌드에 민감한 것으로 묘사된 친구들이 쇼트폼을 촬영하는 장면도 등장했다. 젠더리빌(Gender Reveal) 파티는 ‘성별을 밝힌다’라는 뜻으로 곧 출산할 아이의 성별을 공개하며 축하하는 자리다. 가족 대신 친구들이 모여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 영상이나 사진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하는 것이 요즘 유행이다.
20년 경력의 파티플래너 김주희씨(가명)는 “최근에는 돌잔치 의뢰는 거의 사라지고 ‘셀프 돌잔치’로 돌상을 대여해 가족끼리 간단하게 치르는 것이 대부분”이라며 “대신 결혼 프러포즈나 브라이덜 샤워, 베이비 샤워 파티 장소를 꾸며달라는 의뢰가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5년 전부터는 젠더리빌 파티를 준비해달라고 의뢰하는 고객이 증가했다”고 전했다.
젠더리빌 파티 영상을 살펴보면 부부조차도 자신의 아기 성별 공개에 깜짝 놀라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어떻게 남이 먼저 태아의 성별을 알아내고 파티를 준비할 수 있는 걸까.
얼마 전 임신한 친구의 젠더리빌 파티를 열어준 회사원 김정윤씨는 친구의 산부인과 검진에 동반하는 것으로 파티 준비를 시작했다. “친구가 검진을 마치고 나온 뒤, 나 혼자 진료실에 들어가 의사 선생님께 태아의 성별을 듣고 나와 본격적으로 파티 채비에 들어갔다”는 김씨는 ‘수고롭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제일 친한 친구에게 멋진 선물을 하고 싶었기에 오히려 즐거웠다”는 소감을 전했다.
젠더리빌 파티는 더욱 극적인 영상을 추구하는 트렌드와 맞물려 연막탄에서 비행기쇼까지 다양하게 연출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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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리빌 파티 영상 공개는 비단 연예인이나 유명인만 하는 것은 아니다. 소셜미디어에서 ‘젠더리빌’을 검색하면 ‘드라마틱’한 설정을 통해 생면부지 남의 집 아기 성별을 알 수 있는 영상이 수두룩하다. 성별을 공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상자 안에 분홍색 혹은 파란색 풍선을 넣은 뒤 열어보게 하거나, 주문제작한 케이크를 잘라 내부에 발린 크림의 색으로 성별을 확인하는 것이다. 색종이 조각, 깃발, 피냐타(박 터트리기), 연막탄을 쓰기도 한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젠더리빌 파티를 위한 성별 확인 풍선이나 아이 모양의 공기인형, 토 등 파티용품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젠더리빌 파티에서는 기본적으로 분홍색은 여자 아기, 파란색은 남자 아기로 통용된다. 성별을 색으로 나누는 고정관념을 지양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어찌해서인지 최신 유행인 젠더리빌 파티는 이 이분법이 답습된다.
젠더리빌 파티를 처음 연 미국인 인플루언서 제나 카르부니디스. SNS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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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리빌 파티는 언제부터?
젠더리빌 파티를 처음 연 이는 미국인 인플루언서 제나 카르부니디스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08년 자신의 블로그에 케이크를 자르는 장면을 올려 태아 성별이 여자라는 것을 공개했다. 여러 차례 조기유산을 경험한 그가 이번 임신에서는 성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태아가 건강하다는 점을 구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 마련한 이벤트였다.
이후 젠더리빌 파티는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퍼져나갔고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특별한 경험이 되는 사회에서 이 같은 상황은 불특정 다수에게는 흥미로운 콘텐츠가 된다. 더욱 극적인 영상을 추구하는 트렌드와 맞물려 점점 과격해지는 설정은 미국에서 종종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2020년 엘도라도에서 젠더리빌 파티에 사용된 불꽃 장치 오작동으로 큰 화재가 일어났고 애리조나주에서는 같은 이유로 2800㏊의 산림이 불타기도 했다. 최근에는 비행기 스턴트를 활용해 젠더리빌 영상을 찍다 비행기 조종사가 추락해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다행히 국내에서는 과격한 젠더리빌 파티를 선호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이 낯선 이름의 파티를 두고 ‘유난’과 ‘축하’ 사이에 팽팽한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파티의 주최자부터 참가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김유영씨(가명)는 친구의 부탁으로 젠더리빌 파티에 참석했던 경험을 들려줬다. 그는 “당사자는 한껏 신이 났지만 시간 내서 파티를 준비한 친구들은 방청객 내지는 들러리가 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며 “그런 사적인 일은 가족끼리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전했다.
파티플래너 김씨는 “절대 잊지 못할 젠더리빌 파티가 있었다”며 한 일화를 소개했다. 파티의 클라이맥스인 성별 공개 타임에서 소위 ‘갑분싸’가 되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고조되고 태아의 성별이 딱 공개되었는데, 아버님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어요. 평소 바랐던 성별이 나오지 않은 거예요.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웃지 않았던 파티 주인공을 두고 초대된 사람들이 분위기를 띄웠지만 충격이 컸는지 쉽게 풀리지 않더라고요. 결국 허둥지둥 파티를 마무리했던 기억이 있어요.”
젠더리빌 파티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출산율도 낮은데 임신 관련 이벤트가 유행하는 것은 보기 좋다”는 것이다. 게다가 2000년대 초반까지도 남아선호 사상이 팽배했던 만큼 이제는 아들과 딸, 성별 상관없이 새 생명 탄생의 기쁨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큰 변화라고 보는 이도 있다.
국내에서는 이 낯선 이름의 파티를 두고 ‘유난’과 ‘축하’ 사이에 팽팽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픽셀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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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잔치보다 선호되는 이유는?
나은영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이를 ‘중요한 타인’의 범주 변화 그리고 달라진 ‘미디어 환경’이라는 두 가지 요인으로 해석했다.
나 교수는 “주변의 중요한 타인(significant others)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인간의 욕구는 여전하지만, 중요한 타인에 대한 범위가 과거에는 위아래 세대였다면 지금은 비슷비슷한 친구로 변화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개인에게 중요한 타인의 범위가 친한 친구로 옮겨지다 보니 그들이 선호하는 파티로 축하 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미디어 환경 변화로 인한 소셜미디어의 발달도 한몫했다. 그는 “과거에는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공유하기 쉽지 않아 날을 잡고 친인척이나 지인을 불러 잔치를 했다면 이제는 누구든 소셜미디어를 통해 아이 성장 과정을 지켜볼 수 있으니 행사가 지극히 작은 규모로 긴밀하게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티 행위 자체를 콘텐츠 삼아 소셜미디어에 공개하는 시점에 대해 ‘나르시시즘’이란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심리학자도 있다. 미국 조지아대 심리학과 W 키스 캠벨 교수는 자신의 X(구 트위터)에 “전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아기 탄생을 축하하는 건 좋은 일이나 이를 소셜미디어에 공개하는 행위에는 자기 과시적인 부분도 존재한다”며 “사람들은 자신의 결혼이나 출산을 공개하는 것으로 사회적 인정과 관심을 받으려는 심리적 욕구가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젠더리빌 파티 유행을 낳은 카르부니디스는 2019년 영국 매체 가디언 인터뷰에서 “파티에 대해 다양한 문제 제기가 있어 ‘내가 나쁜 것을 확산시켰다’는 생각이 들어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당시 성별을 공개했던 딸이 지금은 성별비순응적(gender-nonconforming) 개인으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정장 슈트를 즐겨 입는다는 근황을 밝히며 “드레스보다는 정장과 블레이저 입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내 딸로 인해 성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언급했다. 그는 “젠더리빌 파티를 열 수는 있지만 애초에 성별은 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라며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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