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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전쟁 속 인간의 나약함과 인생의 허망함 [전쟁과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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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평론가]

의사이자 시인, 극작가였던 고트프리트 벤(1886~1956년)은 1·2차 세계대전에 모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전장戰場에서 숱한 죽음을 겪으면서 그는 필사적으로 시를 썼다. 벤은 자신의 시에서 자연과 인간을 아름답게 묘사하지 않는다. 특히 인간의 육신을 한없이 허무하게 그린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전쟁 속 인간의 나약함과 인생의 허망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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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앞에서 인간은 나약한 존재일 뿐인다. 영화 1917의 한 장면.[사진 | 더스쿠프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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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해부는 생명을 다루는 의학도의 필수 과정이다. 카데바(Cadaver·해부용 시신) 앞에서 인간의 정신과 관념은 사라지고 오직 뼈와 근육, 신경과 혈관만 남는다. 의학도는 인간의 육신을 냉정하게 관찰하면서 비로소 의사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익숙해진다 해도 인간의 뼈와 살, 피를 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장戰場에서 의사는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인간의 육신은 허무하게 훼손되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살릴 수 없는 부상병이 넘쳐난다. 생명을 살려야 하는 소명과는 달리 전장의 의사는 인간이 얼마나 하찮게 무너지는가를 거듭 확인해야만 한다.

의사이자 시인, 극작가였던 고트프리트 벤(1886~1956년)은 두차례 세계대전에 모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전장에서 숱한 죽음을 겪으면서 그는 필사적으로 시를 썼다. 벤의 시에서 자연과 인간은 아름답게 묘사되지 않는다. 특히 인간의 육신은 한없이 나약하고 허무하게 그려진다. 그의 시는, 불결하고, 참혹하고, 아프다.

"갈대밭에 길게 누워 있는 처녀의 입이/ 무엇엔가 갉아 먹힌 듯했다/ 가슴을 풀어헤치자 식도에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급기야 횡격막 아래 으슥한 곳에서 새끼쥐들의 둥지가 나왔다/ 거기 한 작은 암컷이 죽어 나자빠져 있네/ 다른 쥐들은 간과 콩팥을 먹고 살며/ 찬 피를 빨아마시고/ 여기서 아름다운 청춘을 보냈지/ 시원스럽게 후다닥 그들도 죽어갔다/ 그들 모두 물속에 던져졌는데/ 아, 그 작은 주둥이들의 찍찍거리는 소리라니(고트프리트 벤, '아름다운 청춘' 전문)."

고트프리트 벤은 1886년 5월 2일, 독일 만스펠트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벤은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군의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의학과 문학, 문헌학 등을 배우며 시인의 자질을 싹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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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대학 의학부로 적을 옮긴 후 그는 의과대학을 수석 졸업했다. 군의관이 된 직후 벤은 딱딱한 질서를 거부하는 성품 탓에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고 군에서 쫓겨났다. 고트프리트는 베를린에서 피부비뇨기과 병원을 열었다.

당시 베를린은 급격히 팽창하는 젊은 도시였다. 극장, 술집, 공장, 사창가가 어지럽게 들어섰고, 각종 범죄가 만연했다. 피부비뇨기과를 전공한 탓에 벤의 주요 고객들은 베를린 사창가에서 일하는 여성들이었다. 이 시기의 진료 기록은 전장의 경험과 함께 그의 시에 큰 영향을 줬다.

1912년, 벤은 첫번째 시집 「시체공시장·기타」를 500부로 한정 출간했다. 시체의 이미지가 가득한 이 시집은 19세기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에 반기를 든 '표현주의'적인 관념을 반영한 작품들로 가득했다.

수록된 시들은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그는 인간의 육신, 특히 남녀의 생식기를 상처와 부패의 진원지로 묘사했다. 이 시집은 다가올 전쟁의 풍경을 예고하는 하나의 징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벤은 군의관으로 징집돼 벨기에 전선에 배치됐다. 벤의 시는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조명을 받았다. 격렬한 참호전이 벌어지면서 헤아릴 수 없는 시신이 넘쳐났고, 거듭 떨어지는 포탄에 산산조각이 난 시신들은 수습할 수조차 없었다.

토막난 병사들의 시신은 쥐떼들의 먹이가 됐다. 과학 기술은 효율적인 살육의 도구가 됐다. 전장에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고, 오직 파멸만이 가득한 전장이었기에 역설적으로 벤은 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전장에서 그가 쓴 시들은 「살(肉)(1917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종전 후 벤은 베를린으로 돌아와 다시 피부비뇨기과를 개업했다. 병원은 번창했으나, 전쟁을 겪으면서 그는 인생을 즐기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이 됐다. 거리에는 부상병과 실업자가 넘쳐났다. 아내는 사망했고(1922년), 벤은 니힐리즘(허무주의)에 깊이 빠져들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벤은 국가 사회주의에 잠시 경도돼 군대에 들어갔다. 벤은 나치 치하에서 정치적인 활동도 하지 않았으나, 훗날 이 시기의 입대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과오'였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벤은 57세의 나이에 다시 군의관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벤의 주요 진료 대상은 전쟁 중 군인을 상대하는 창녀들이었다. 여성의 성병 여부를 검사해 '쓸모'를 판정하는 것이 그의 주요 업무였다. 두차례의 전쟁 경험은 그를 지독한 비관주의자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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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속에서 쓴 벤의 시는 「살(肉)」이란 이름으로 출간했다.[사진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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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에게 인간이란 곧 '병에 걸린 동물'에 불과했다. 성욕을 가진 인간은 사랑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무섭게 전장에서 무의미하게 죽는다. 전장에서 여자들은 일시적인 쾌락의 대상일 뿐이다. 수십년에 걸쳐 이런 악순환을 목격한 벤은, 전장에서 강박적으로 시와 편지를 썼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두 번째 아내 헤르타마저 폭격으로 사망했다.

전쟁이 끝나고, 벤은 다시 베를린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그는 망명을 가지도, 체포되지도 않았다. 이듬해에는 치과의사 카울 박사와 세번째 결혼을 했다. 벤이 쓴 시들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20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떠올랐다. 1951년 벤은 독일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5년 후 벤은 암 진단을 받은 지 하루 만에 사망했다.

벤은 죽기 전 친구 빌헬름 올체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람들은 그가 치과의사인 아내에게 극약을 얻었으리라고 짐작하지만, 정확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은 단 한번의 생(一生)을 산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의사로서 겪은 사람은 거의 없다. "모든 것은 고통스럽게 머물며/ 영원한 질문을 던진다. 무엇 때문에?(고트프리트 벤, '다만 두가지뿐'에서)." '죽음의 시인' 벤의 작품은 인간의 나약함과 인생의 허망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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