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세포 찾아내고 방사선 방출해 공격
유통 과정 줄여야 하는 방사성의약품
국산 공급 확대 시도... 관건은 생산비
편집자주
우주,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에너지 등 첨단 기술이 정치와 외교를 움직이고 평범한 일상을 바꿔 놓는다. 기술이 패권이 되고 상식이 되는 시대다. 한국일보는 최신 이슈와 관련된 다양한 기술의 숨은 의미를 찾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심층 분석하는 '테크 인사이트(Tech Insight)'를 격주 금요일 연재한다.신경내분비종양을 앓는 72세 이철민(가명)씨가 서울 노원구 한국원자력의학원 원자력병원에서 '악티늄-225' 기반의 방사성 의약품을 사용하는 임상시험에 참여해 치료를 받고 있다. 원자력의학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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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세 남성 이철민(가명)씨는 직장 신경내분비종양을 앓고 있다. 미국 빅테크 애플의 창업자 고(故) 스티브 잡스가 앓았던 것으로 알려진 이 병은 치료 난도가 매우 높다. 이씨가 첫 수술을 받은 시기가 2018년 1월이니 다음 달이면 꼬박 투병 7년째다. 간으로 전이된 종양을 없애기 위해 색전술을 받았고 항암치료도 수차례, 효과 좋다고 알려진 방사성 의약품 '루타테라'까지 네 번이나 맞았다.
그러나 지난해 다시 상태가 악화해 이씨는 서울 노원구 한국원자력의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여기서 이씨는 또 다른 방사성 의약품의 임상시험에 참여하며 희망이 생겼다. 처음 약을 투여한 이후 검사에서 종양 수치가 낮아지고, 크기도 1㎝ 이상 줄었기 때문이다. 지난주엔 세 번째로 이 약을 투여했다.
빅파마들이 동위원소에 눈독 들이는 이유
방사성 의약품은 이씨가 임상시험에 참여하고 있는 것 말고도 종류가 많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개발돼 환자들에게 쓰여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방사성 동위원소가 원료로 사용되면서 방사성 의약품의 효과가 크게 향상돼 최근 다시금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씨에게 사용됐던 루타테라와 전립선암 치료제 '플루빅토'가 대표적인 예다. 이들 약의 원료가 되는 방사성 동위원소는 '루테튬-177'이다. 둘 다 글로벌 제약사 노바티스 제품인데, 지난해 기준 플루빅토는 1조4,000억 원, 루타테라는 8,2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노바티스의 성공이 가시화하면서 이른바 글로벌 빅파마들이 경쟁적으로 새로운 방사성 의약품 개발에 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노바티스는 방사성 의약품 기술을 보유한 다른 기업들과의 인수합병을 추진 중이고, 아스트라제네카와 일라이릴리 등도 관련 기업을 사들이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방사성 의약품 시장은 7조5,000억 원 규모로 집계됐다. 연평균 11.3%의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어, 오는 2032년이면 19조7,000억 원 규모로 확대될 거란 예상이다.
방사성 의약품 투여 전후 전립선암 환자에게 나타난 변화를 보여주는 독일 연구진 논문의 그림. 투여 전에는 종양(까만색)이 체내에 퍼지고 있었는데(A), 루테튬-177 기반 방사성 의약품으로 2회 치료를 한 뒤 오히려 더 확산되는 듯한 상태(B)가 됐다. 이후 악티늄-225 기반 방사성 의약품으로 2회(C), 3회(D) 치료한 다음엔 종양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더 저널 오브 뉴클리어 메디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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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시장이 특히 눈독을 들이고 있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바로 이씨가 현재 임상시험에 참여하고 있는 '악티늄-225'다. 루테튬이 방사선 가운데서도 베타선과 감마선을 내는 것과 달리 악티늄은 알파선을 방출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더 강하다. 그만큼 체내로 들어갔을 때 암세포를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임일한 한국원자력의학원 핵의학과장은 "악티늄이 약 8년쯤 전부터 각광받고 있는데, 루테튬 치료에서 효과가 없던 전립선암 환자에게 악티늄 치료를 했더니 전이됐던 병변이 사라졌다는 결과도 보고돼 있다"고 설명했다. 원자력의학원을 비롯한 국내 여러 의료기관이 현재 루테튬으로 만든 방사성 의약품의 임상시험을 진행 또는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 新 패러다임 '테라노스틱스' 등장에 영향
한국원자력연구원 관계자가 11월 29일 대전 유성구 원자력연구원에서 방사성 물질을 취급하는 특수 설비인 '핫셀' 속 원격조정기를 외부에서 조작하고 있다. 대전=이한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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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정맥주사제 형태인 방사성 의약품은 방사성 동위원소에 화학분자(유도체)가 붙어 있는 구조다. 원자 중심부의 원자핵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서로 강하게 결합해 있는데, 방사성 동위원소들은 이 두 입자 개수의 균형이 맞지 않아 상태가 불안정하다. 그래서 안정한 상태가 되려고 변화하는 과정(방사성 붕괴)에서 알파·베타·감마선 등의 다양한 방사선을 방출한다.
이때 어떤 방사선을 방출하느냐가 동위원소 종류마다 다르다. 대개 감마선을 방출하는 동위원소는 진단용으로, 알파·베타선을 내는 동위원소는 치료용으로 사용된다. 특히 감마선과 베타선이 함께 나오는 동위원소는 의학 분야에서 진단·치료를 동시에 하는 '테라노스틱스'(Theranostics)라는 새로운 영역의 등장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쳤다. 방사성 동위원소가 의약품의 형태로 몸속에 들어가긴 하지만, 반감기(방사성 물질이 반으로 줄어드는 시간)가 수시간에서 수일 내로 짧은 것들만 극소량 이용되는 만큼, 부작용 우려보다 치료 효과로 얻는 이점이 더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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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성 의약품이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동위원소 못지않게 유도체의 역할도 중요하다. 유도체는 암세포가 특징적으로 갖고 있는 단백질이나 효소에 달라붙을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동위원소가 방사선으로 공격할 암세포를 정확히 찾아갈 수 있도록 유도체가 일종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유도체가 내주는 길을 따라 간 방사성 동위원소가 암세포를 찾아낸 다음 자체 무기(방사선)를 이용해 파괴하는 원리다.
대전 루테튬, 서울 악티늄, 부산 요오드 생산
11월 29일 대전 유성구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있는 '핫셀'(방사성 물질 취급 설비) 내부. 외부 사람의 조작에 따라 원격조정기(오른쪽 팔 모양)가 움직이고 있다. 대전=이한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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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성 의약품은 반감기 내에 생산·소비돼야 약효가 유지되기 때문에 유통 과정이 길어지면 그만큼 손해다. 해외에서 수입해오는 것보다 국내에서 자체 생산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정부도 1960년대부터 한국원자력연구원과 원자력의학원을 중심으로 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를 자체 생산하고 있다. 원자력연은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를, 의학원은 사이클로트론을 동위원소 생산에 이용한다. 이들 외에도 일부 병원들이 자체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 반감기가 매우 짧은 진단용 동위원소를 생산하고 있다.
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량은 하나로가 가장 많은데, 몇 년 새 부침이 있었다. 갑상샘암·간암·신경모세포종(희소소아암) 등을 위한 치료제를 만드는 하나로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내진 보강을 위해 3년가량 운영을 멈췄다가 재가동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자주 중단되면서 동위원소 생산이 장기간 불안정해졌다. 올해 하반기부터야 생산이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원자력연 측은 설명했다. 환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29일 대전 유성구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조은하 방사성의약품지원센터장이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대전=이한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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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하나로가 루테튬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연구용으로만 소량 만드는 정도라, 치료용 루테튬은 여전히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루테튬 방사성 의약품으로 치료를 받으려는 국내 환자들이 독일을 비롯한 외국으로 나가 '의료 난민'이 되고 있는 이유다. 이에 정부는 지난달 루테튬을 비롯한 방사성 의약품 원료부터 생산 기술까지를 2030년 안에 국산화하겠다는 목표를 내놓았다. 원자력의학원은 자체 사이클로트론에서 내년 상반기부터 악티늄을 생산하기 위해 원자력안전당국의 최종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20516390001603)
현재 부산 기장군 일대 원자력의과학특화단지에 새로 짓고 있는 연구용 원자로가 완공되면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이 확대돼 수출도 가능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홍진태 원자력연 동위원소연구부장은 "기장 원자로가 완공돼 루테튬과 '요오드-131'(신경모세포종 치료용)을 성공적으로 생산하면, 국내 공급은 커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이후에는 악티늄-225를 생산할 계획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 유성구 한국원자력연구원 내 방사성 동위원소 제작 시설 입구. 이곳을 방문할 땐 피폭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방진 가운을 입고, 방사선량계를 소지해야 한다. 취재를 마치고 나온 뒤 기자의 방사선량계에 '0'이 표시돼 있다. 대전=이한호·오지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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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 비용을 얼마나 낮출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원료 만드는 데 돈이 많이 드니 방사성 의약품은 비쌀 수밖에 없다. 비교적 출시가 오래된 루타테라는 건강보험 급여 적용이 되고 있지만, 플루빅토는 적용 전이라 1회 주사가 3,300만 원에 이른다. 여러 번 맞아야 하는 점을 고려하면, 약값만 1억 원이 훌쩍 넘는다. 악티늄 방사성 의약품은 임상시험용 약값도 2,400만 원 이상이다. 이교철 원자력의학원 방사선의학연구소 RI응용부장은 "환자들 부담을 덜기 위해 조금이라도 비용을 낮출 수 있도록 기술 개발에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오지혜 기자 5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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