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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목)

[직설]태어나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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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른 살 생일을 맞았다. 생일 직전, 유전자 사회학 강의에서 착상 전 유전 진단 검사에 대해 배웠다. 한정적인 질병만 검사할 수 있었던 과거 유전자 검사가 개선되어, 이제 배아 단계에서 검사를 통해 암, 지능, 키, 조현병 등의 발병 소지 등을 확률적으로 진단하는 새 유전자 검사 기술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심란함을 느꼈다. 정교한 유전자 검사가 등장한 지금 나는 과연 태어날 수 있는 유전자를 가졌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의료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되었다. 후천적 장애이긴 하지만, 유전적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과연 의료사고가 장애 원인의 전부일지 스스로 되묻곤 한다. 어쩌면 의료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언젠가 유전자 문제로 장애인이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만일 내 부모가 지금 문제적 유전자를 가진 나를 임신했다면 새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내 장애 여지를 확인하고 나를 지웠을까.

공상과학소설 주제 같기는 하지만, 반대 질문도 따라왔다. 내가 태어나기 전 친모의 유전자를 알았다면 세상에 나오길 택했을까. 엄마는 중증의 조현병과 조울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장암 투병 중이기도 하다. 조현병과 대장암은 대표적인 유전질환에 속한다. 내 엄마는 평생 술·담배 한 번 한 적 없음에도, 두 가지 병을 모두 갖게 된 만큼, 가족의 유전적 영향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부모가 배아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게 아니라, 배아가 발달 단계에서 부모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조현병과 조울증’, ‘대장암’ 발병 유전자를 갖고 있는 부모를 내 부모로 택했을까. 부모가 아픈 자녀를 키우는 데 용기가 필요하듯, 자녀도 아픈 부모와 살아가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 아마 나는 고민 끝에 정신병과 암에 관한 유전자를 함께 지닌 친모를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난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의 고민과 무관하게 나는 택해졌고, 태어나졌다. 내 몸 한 구석에 그로부터 물려받은 정신병과 암에 관한 유전자가 있을지도 모르며, 언제 발병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긴장하며 살고 있다. 태어남의 고통에 대해 고민하는 와중에 받은 친구의 생일 축하 메시지와 아버지의 위로가 담긴 생일 메시지를 연이어 읽었지만, 답장할 힘이 없어 휴대폰을 껐다.

생일을 어서 보내고 싶어 일찍이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그 무렵, 방문 앞에서 서성이는 친구들이 까르르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즐거운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하다 문을 열지 않은 채 그대로 꾹 눈을 감았다.

다음날 아침 등굣길,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방문을 연 순간. 화려한 풍선과 생일 축하 문구가 문 앞에 화려하게 장식된 것을 보고 활짝 웃음이 나왔다. 태어나길 잘했을까 자책하는 동안 다른 이들이 태어나길 잘했다며 생일을 장식해 준 사실이 어색하고 반가웠다.

과학기술 발전과 함께 장애 없이 건강한 부모와 자녀만을 꿈꾸는 게 당연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만, 부모로서나 자녀로서나 불완전하게 태어난 현재에 만족하기로 했다. 불완전하나마 끝까지 살기를 택했기에 사랑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단념하지 않고 태어나길 잘했다!

경향신문

변재원 작가


변재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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