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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수)

“공존에는 진실이 필요하다”···모녀가 ‘10만 피트’에 달하는 필름을 되살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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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피해자들의 증언이 담긴 필름을 편집하고 있는 박마의 감독(왼쪽)과 박수남 감독. <되살아나는 목소리>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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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봐도 저는 이 사람이 누군지, 왜 우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음성만 듣고도 바로 기억을 하시더라고요. 몇 년도에 태어났는지, 어떻게 일본에 오게 됐는지, 원폭을 맞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도요.”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공동 제작자인 박마의 감독(56)은 이 영화에 쓰인 16㎜ 필름 원본의 디지털 복원과 편집을 맡았다. 필름을 촬영한 당사자이자 자신의 어머니인 박수남 감독(89)이 몇 년 전부터 황반변성을 앓아 시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눈이 안 보이는 어머니를 대신해 ‘10만 피트’에 달하는 필름들을 일일이 분류하고 편집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200명이 넘어요. 어머니가 촬영한 분들이요. 음성만 듣고도 태어난 연도까지 기억해내시는 건 그들 한명 한명이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오는 13일 개봉하는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200명이 넘는’ 증언 영상 중 일부를 담았다. 원폭 피해를 당한 뒤 한국에 돌아왔지만 후유증 때문에 시댁에서 쫓겨나야 했던 김분순씨, 강제 징용된 호쇼 탄광에서 갱도가 무너져 동료를 잃었지만 그들의 시신 대신 캐놓은 석탄을 먼저 끌어내야 했던 안용한씨, 군함도에서 매일 설사와 폭력에 시달리며 자살 기도와 포기를 반복했던 서정우씨 등이다.

“피해자들은 고령이라 이미 많이 돌아가셨어요. 그들의 증언을 담은 필름도 열화 현상 때문에 소실될 위기였어요. 디지털 복원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되살리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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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남 감독(왼쪽)과 그의 딸 박마의 감독. 시네마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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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2세인 박 감독은 1935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30살이던 1965년부터 일본 내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생계를 위해 고깃집을 운영하면서 프리랜서 작가로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녹음해서 글로 풀었죠. 하지만 한계가 있었어요. 피해자들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 말을 잇지 못하곤 했어요. 한국어도 일본어도 모두 서툴렀어요. 한국어는 많이 잊어버렸고, 일본어는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한 건 이 때문이었다. “영상은 그들의 말 대신, 사시나무 떨듯 떠는 몸과 표정을 담아낼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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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기를 매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박수남 감독(왼쪽). <되살아나는 목소리>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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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카메라를 들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오키나와와 군함도, 탄광 부지 등을 누볐다. 원폭 피해자를 만나기 위해 한국의 대구까지 찾아왔고, 제암리에선 학살 사건 유족도 만났다. 1986년 첫 영화 <또 하나의 히로시마>를 시작으로 최근작인 <되살아나는 목소리>까지 5편의 영화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일본의 극장들이 상영해줄 리 만무했다. 직접 일본 300여 개 지역을 돌아다니며 장소를 구하고, 관객을 모아 시민 상영회를 열었다.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영화를 상영할 당시엔 일본 극우단체가 방해하기도 했다.

돈은 모두 자비로 댔다. 운영하던 ‘고깃집’도 처분했다. (박마의 감독/딸):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하는 일은 개인이 하는 일이 아니다 왜 한국이 하지 않느냐’, ‘왜 어머니는 생활비를 (영화 만드는데) 다 쓰고, 우리도 가난한데 돈 가져가서 피해자분 다 주고... 이런 건 나라가 해야 하는 일 아니냐’라고 어머니에게 따지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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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인터뷰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박수남 감독(왼쪽에서 두 번째). <되살아나는 목소리>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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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버림받은 절망에 대한 공감

박수남 감독은 일제의 탄압을 직접 겪은 1세대가 아니다. 그런데도 ‘나라를 대신’하기 시작한 건 1958년 ‘코마츠카와 사건’이 계기였다. 재일교포 2세인 이진우는 일본인 여성 2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조총련 소속 기자로 일하던 박 감독은 이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혐의를 가벼이 여긴 건 아니었다. 그의 절망에 공감했다. 재일 조선인 중에서도 극빈층이었던 이진우는 청각장애인 어머니를 돌보며 공장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IQ 135의 수재로, 우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업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그는 (한국의) 역사도, 말도 모르고 자랐어요. (한)민족으로서의 자존심도 없었어요. 그렇다고 일본인으로 살아갈 수도 없었죠.”

그에게 이진우, 차별받는 재일 조선인, 일제 당시 피해자들은 ‘또 다른 나’였다. “어릴 적 한복 저고리를 입은 어머니와 길을 걷는 게 좋았어요. 그런데 돌이 날아왔습니다. ‘조센징’, ‘더러워’, ‘돌아가’···, 저는 어머니 치마 속으로 몸을 숨겼어요. 그 순간,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조총련은 당시 북일 관계 악화를 우려해 그에게 이진우 사건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했다. 그가 거절하자 그를 축출했다. 한국으로의 유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당시 박정희 정부는 조총련 관련 이력을 문제 삼았다.

딸 박마의 감독은 “어머니만 겪는 일은 아니었다”고 했다. “조선인 원폭 피해자 중 일부는 한국으로 돌아간 뒤 ‘문둥이’ 소리를 들으며 소박을 당했어요. 1991년 <아리랑의 노래>를 상영할 때까지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알려지지조차 않은 상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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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일본 후쿠오카현 지쿠호의 탄광촌에 사는 재일조선인 가족과 박수남 감독(당시 30세,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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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우리’가 만드는 이유

그래도 모국을 사랑한다고 했다. (박마의 감독/딸): “ 저는 일본에서 살아가야 해요. 한국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고 자라신 곳이에요. 북한에는 이모가 살고 있어요. 모두 제 모국이에요.”

그래서 ‘진솔한 공존’을 바란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일본인 동료들 덕분이었어요. 그들은 할아버지가 절대 ‘우물에 독을 탈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요. 영화 상영회를 열면 많은 일본인 관객들이 박수를 칩니다. 다음 상영회는 자기가 열겠다고 하는 분도 있어요.”

‘진솔한 공존’에는 ‘진실’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게 영화를 만드는 이유라고 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할아버지를 지켜주고, 박수를 쳐주고 상영회를 열어주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왜곡하고 감추려는 지배자가 아닌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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