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
갓난아기를 키우는 시절, 밤낮없이 깨어 보채는 신생아를 안고 잠을 설치는 날이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시기에 주문처럼 외웠던 말이 있다. 바로 ‘백일의 기적’이다. 서너 시간을 간격으로 자다 깨다를 반복해 양육자를 녹초로 만들던 아기는, 신기하게도 생후 백일 전후로 일정한 수면-각성 패턴을 보이며 양육자에게 약간의 여유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생체시계를 찾아서
생물은 ‘백일의 기적’과 같은 수면-각성의 패턴뿐 아니라, 체온, 호르몬 농도, 혈압, 소화 및 대사 기능 등 특정 생명 현상이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패턴을 보인다. 생물들은 얼핏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자체적인 생체시계(biological clock)의 주기성에 따라 나름의 질서정연한 삶을 꾸려나가는 중이다. 생체시계라는 단어는 이미 익숙하기에, 많은 이들이 몸속 어딘가에 시계 역할을 하는 기관이 존재한다고 여기곤 하지만, 실제로 생체시계란 특정한 순서에 따라 켜지고 꺼지는 여러 개의 유전자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단백질들의 상호작용 현상이다. 그래서 학자들의 연구 방향 역시도 생체 시계 그 자체가 아니라, 생명 활동의 주기, 그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을 유전자가 어떻게 조절하는 지에 가장 초점이 맞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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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혈압 등 일정 주기로 반복
생체시계의 주기성에 따른 질서
많은 유전자 생체시계 구동 관여
조율센서, 변화 대응해 주기 조절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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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파리를 연구하던 연구진들은 초파리의 잠을 조절하는 유전자를 찾아내 ‘피리어드 유전자(Period gene)’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밤이 되면 초파리의 세포 속 피리어드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지고, 이로 인해 세포 내에는 이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진 PER 단백질이 축적된다. PER 단백질의 축적은 초파리를 잠들게 한다. 시간이 지나 PER 단백질이 계속 쌓여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타임리스 유전자(Timeless gene)의 스위치가 켜지며, 이들이 만들어낸 TIM 단백질이 PER 단백질과 결합해 세포핵 속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이동이 신호가 되어 피리어드 유전자의 스위치는 꺼지고, 만들어진 PER 단백질은 분해된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초파리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피리어드 유전자는 사람에게도 존재하며, 현재는 피리어드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시계유전자(Clock gene), PER 단백질의 분해를 촉진하는 더블타임 유전자(doubletime gene) 등을 비롯해 수백 가지에 달하는 생체시계 관련 유전자들이 밝혀진 상태다.
반복되는 생명현상, 시간생물학의 대상
이처럼 ‘시간과 생명현상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시간생물학(chronobilogy)이라 한다. 흥미롭게도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자식들을 태어나자마자 모조리 집어삼키는 비정한 아버지 크로노스(Cronos)와 같은 어원을 가진다. 크로노스의 끔찍한 포식 행동은, 그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칼로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했듯 그 역시도 친자식에 의해 몰락하리라는 신탁에 기인했으며, 결국 크로노스는 막내아들인 제우스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난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시간의 운명은 세상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는 신들의 암투에서부터, 다이어트 중에도 빠짐없이 찾아오는 배꼽시계의 울림과 찰나의 생을 살아가는 초파리의 짧은 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촘촘하게 펼쳐져 있다.
애기장대.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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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생물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알려진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생체시계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표적 실험식물인 애기장대(Arabidopsis)의 경우, 전체 유전자(약 2만 5천개)의 1/3에 해당하는 수의 유전자가 일주기 리듬에 따라 발현량이 조절될 정도다. 사람의 경우는 이보다는 적으나, 기존에 알려진 유전자 외에도 추가적인 유전자가 생체시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해보인다. 이토록 많은 유전자가 생체시계를 구동하는 데 관여한다는 것은 주기적 반복 패턴이 생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드러낸다.
항상성 유지가 관건
생물이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항상성(home ostasis)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인체는 체온 36.5℃, 혈중 pH 7.365을 유지하지 못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환경은 유동적이라 항상성을 위협한다는 것이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동적인 환경도 주기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복되는 일주기와 연주기를 예측하여 이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미리 갖추고 있는 것이 좋다. 생물이 지닌 생체시계의 자체적인 주기성, 즉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만 생활해도 주기적으로 수면-각성 패턴을 보이는 것도 이미 자체적으로 내장된 주기 시스템 때문이다.
눈으로 들어온 빛으로 시간을 감지하는 생체시계는 뇌(시신경 교차상핵)에 있으며 심리상태, 장기운동 등의 바이오리듬을 조절하는 물질을 만든다.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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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지구의 자전은 24시간이지만,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은 매일같이 달라지는 등 세부 변화는 다양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생체시계에는 조율 센서가 있어 이에 따라 주기를 조절한다. 빛을 인지해 멜라토닌을 분비하고, 일조량의 변화를 감지해 개화 호르몬을 분비하며, 기온의 하강을 인식하고 지방 비축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기성을 갖지만 세부 변화는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물도 역시 자체 주기성에 더해 센서를 통한 미세조율을 거듭하는 정교한 생체시계를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시간생물학은 변화무쌍하지만 주기적인 환경 속에서 역시나 변화에 대응한 주기성을 갖춘 생명체들의 상호관계를 연구하며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발전해갈 분야이다. 시간은 언제나 흘러가므로 말이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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