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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미디어세상]‘앵커 한마디’와 방송 공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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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미국 대선에서 ‘워싱턴 포스트’가 후보 지지 선언을 하지 않아 논란이 됐다. 미국 신문은 특정 후보 지지 사설을 싣는 것이 일반적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발생할 사업상 불이익을 걱정해 이 신문 사주가 해리스 지지를 막은 것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미국, 영국 등과 달리 한국 신문은 후보 지지 선언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2002년 대선 당일 조선일보의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라는 사설이 이례적이었다.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한 것을 철회한 뒤 이 신문은 “유권자들의 선택은 자명하다”며 사실상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물론, 사설로 굳이 밝히지 않아도 한국 유권자들은 어느 신문이 누구를 미는지 잘 안다.

미국 신문이 지지 선언을 하는 것은 중차대한 국가사에 의견을 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주요 이슈에 사설로 자사 생각을 밝히는 일상적인 일의 연장일 뿐이다. 다만 이것은 사실 기반의 객관 보도를 추구하는 일반 기사들이 만들어낸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신문의 견해 표명은 기사면이 아닌 칼럼이나 사설 등 의견 페이지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을 ‘사실과 의견의 분리’ 원칙이라고 한다. 신문이 특정 이념을 주창하든, 정치적 편향성을 띠든 자유지만 서양의 권위지는 신뢰를 위해 이 원칙을 스스로 지켜왔다.

한국 신문은 사실과 의견의 분리가 잘 안된다. 때론 일반 기사 제목만 봐도 신문의 생각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내용에서도 사실에 주관을 섞어, “논란이 일고 있다”라는 식의 주어 없는 문장 등으로 ‘주관의 객관화 전략’을 쓴다. 기자가 정작 말하고 싶은 바를 남의 말을 빌려 따옴표 제목으로 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불편부당’을 내세우는 한국 주류 신문이 차마 사설에서까지 특정 후보를 ‘공식’ 지지하기는 민망할 것이다.

방송은 신문과 달리 단신, 리포트, 앵커 발언 등 어느 형식이든 의견을 밝히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사회 자산인 전파를 사용하는 만큼 공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자든 진행자든 사실만을 전달해야 한다. 영국의 뉴스 진행자는 ‘뉴스 소개인’(news presenter)이라고 하여 단신 뉴스를 읽고, 기자를 연결하거나, 인터뷰하는 역할만 한다. 미국 뉴스 진행자는 배의 닻처럼 중심을 잡아 여러 요소를 연결한다며 앵커라고 부른다. 전통적으로 영미 지상파 방송의 진행자는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폭스뉴스’ 등 케이블 뉴스 채널만이 정파 신문처럼 주관 표현을 자제하지 않을 뿐이다.

한국은 방송 리포트에도 객관적 사실 외에 주관적 판단과 추론이 녹아 있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지상파 방송에는 해설위원이라는 사람이 나와 자기 생각을 지루하게 펼치곤 했는데 최근에야 없어졌다. 공정성 원칙은 물론 텔레비전 형식에도 안 맞는 것이었다. 요즘은 뉴스 프로그램 진행자가 ‘앵커의 생각’ ‘앵커 한마디’ 등의 코너 이름으로, 또는 뉴스 말미 ‘클로징’으로 주관을 펼치곤 한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는 출연자가 거꾸로 진행자에게 질문하고 진행자가 자신의 견해를 가르치듯 풀어내는 코너도 있다.

앵커의 주관 표명은 언뜻 정의롭고 선명해 보여도 자신의 몫이 아니다. 자기 프로그램이 전제하는 공정·객관성을 부정하는 셈이다. 다른 언론이 그의 발언을 기사화해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공정의 권위를 지닌 사람의 주장’이라는 역설의 강렬함 때문이다. 지상파, 특히 공영방송만이 공정성 의무를 갖는 게 아니다.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보도와 종합편성 채널도 자유로운 진입이 불가능한 사실상 특혜라는 점에서 법적으로 공정성 의무가 있다. 앵커가 적극적이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인터뷰에서 “파우치, 외국 회사의 조그만 백” 발언 등으로 상대방의 홍보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촌철살인의 질문으로 문제점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야 할 때다.

경향신문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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