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경북 봉화군 석포면 석포리 영풍 석포제련소 뒤쪽으로 나무들이 고사한 산비탈이 보인다. 박종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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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들썩인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쩐의 전쟁’이 사태의 전부가 아니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대기업 경영의 ‘이면’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경영 능력을 검증받지 않고 오른 ‘금수저’ 3세와 부실한 지배구조(거버넌스), 그리고 이들이 바꾸지 않은 오래된 환경·노동 문제 등이 지분 다툼 과정에서 고스란히 노출됐다.
① 환경오염, 노동문제 책임 피한 장형진 영풍 고문
장형진 영풍 고문이 지난 2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 국회 의사중계 갈무리 |
“국민과 주민들에게 송구합니다.”
지난 24일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영풍 장형진 고문은 “2015년 영풍 회장에서 퇴임했고 보유 주식도 없기 때문에 오너가 아니다”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국회의원들의 연이은 질타에 도의적 차원의 사과만 한 셈이다. 장 고문과 자녀들이 최대주주인 영풍은 사모펀드 엠비케이(MBK)파트너스와 손잡고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 뛰어들었다. 장 고문이 이날 국회에서 고개 숙인 이유는 뭘까.
그 중심엔 영풍이 운영하는 석포제련소의 환경오염·노동 문제가 있다. 고려아연 지분 25.4%를 보유한 영풍은 고려아연과 같은 아연 제련(가공) 사업을 한다. 1974년 준공한 고려아연 온산제련소가 아연 생산량 세계 1위이지만 석포제련소(세계 4위)는 이보다 4년 먼저 지었다. 고려아연은 ‘아연 생산 원조’인 영풍이 제련 사업 확장을 위해 세운 회사다. 다만 경영은 동업자였던 최씨 일가가 맡았다.
영풍 석포제련소엔 한국 산업화 시대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석포제련소는 인구 1800여명이 사는 경북 봉화군 석포면에 공장 3개동, 약 15만평(50만제곱미터) 규모로 들어서 있다. 태백산 국립공원에서 불과 6㎞ 남짓 떨어진 낙동강 최상류의 산골짜기 청정 지역에 대규모 중금속 공장을 지은 셈이다. 환경 규제가 미미했던 과거에 아연 등 광물을 캐는 광산이 이곳에 모여 있었던 까닭이다.
지난 23일 오전 5시 경북 봉화군 석포면 석포리 영풍 석포제련소 제1공장에서 희뿌연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박종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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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오전 5시 찾아간 석포제련소 제1공장은 굴뚝 3개에서 희뿌연 연기(수증기)가 쉴 새 없이 새벽하늘로 퍼지고 있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매캐한 탄내 사이로 회색 석회가루가 붙은 트럭이 달렸다. 석포제련소는 폐수 불법 유출 등으로 조업 정지 2개월 처분을 받았고, 이에 항소했지만 지난 6월 대구고법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영풍 관계자는 “대법원에 상고를 해 향후 선고 때까지 정상 조업하게 됐다”고 했다.
석포제련소는 외국에서 들여온 광석을 가열하고 전기 분해해 아연을 추출한다. 이 과정에서 대기 오염 물질인 아황산가스와 황산, 카드뮴 등 독극물이 나온다. 대기·토양·수질 오염 논란과 영풍의 불법 행위 적발, 지역 주민들의 우려가 계속되는 이유다. 공장 밀집 지대인 울산 산업단지 내에 위치한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와 달리, 애초 입지 선정 자체가 문제의 화근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 관계자 등은 석포제련소 문제에 대해 장형진 고문의 책임이 있다고 짚는다. 오랫동안 영풍을 운영한 장 고문이 제련소 환경·노동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 뒷짐을 져왔다는 이야기다. 실제 장 고문이 영풍 회장(등기임원)에서 퇴임한 건, 석포제련소 3공장 불법 건축을 계기로 국회 국정감사에서 제련소 환경 문제가 처음 제기된 2014년의 이듬해다.
김수동 안동환경운동연합 대표는 “(권한이 없는) 서류상의 대표이사가 매를 대신 맞아주는 구조이다 보니 석포제련소의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석포제련소에선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8월까지 노동자 3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구지검 안동지청이 작성한 공소장을 보면, 석포제련소 협력업체 노동자는 지난해 12월 유독가스(삼수소화비소)가 유출되는 작업장에서 방독마스크가 아닌 일반 방진마스크를 쓰고 모터 교체 작업을 하다가 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박영민 영풍 대표이사와 배상윤 석포제련소장이 중대재해처벌법·산업안전보건법 등의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안동환경연합은 장 고문을 ‘실질 사주’라며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두 차례 경북경찰청에 고발했다. 하지만 모두 무혐의 처분됐다. 대표이사 등 등기임원이 아니면 ‘회장’, ‘고문’ 등에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현행 제도의 허점이 드러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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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고문이 석포제련소를 비롯한 영풍 경영에서 손 뗐다고 보는 이는 드물다. 영풍은 사내이사 2명(박영민·배상윤)이 모두 구속 중인 지난달 말 이사회를 열어 3천억원을 금융회사에서 빌리기로 했다. 경영권 분쟁 중인 고려아연 지분을 사들일 ‘실탄’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당시 영풍의 이사회 구성원은 박병욱 회계법인 청 대표, 한국방송(KBS)교향악단 사장 출신인 박종옥 설원복지재단 이사,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장을 지낸 최창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등 사외이사 3명뿐이었다. 제련 사업이나 경영 감독과 무관한 경력을 가진 이들이다. 이런 이사진이 영풍 자기자본의 7%에 이르는 대규모 차입금 조달을 순전히 자기 판단으로 결정했으리라 보긴 힘들다. 그동안 책임지지 않는 경영을 해왔던 장씨 일가가 이번 경영권 분쟁에선 고려아연 경영진의 책임을 묻고 나선 것이다.
영풍 쪽은 “사외이사 중심의 의사 결정이 더 투명할 수 있고, 차입 안건도 사전에 경영진과 논의해 공유됐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23일 경북 봉화군 석포면 석포리 영풍 석포제련소가 산들에 에워싸여 있다. 박종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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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최윤범 회장의 고려아연 6천억원 투자 논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지난 2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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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영풍·엠비케이(MBK)파트너스 연합과 맞서는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의 아킬레스건은 ‘묻지마 투자’ 논란에 있다. 고려아연 창업주 일가 3세인 최 회장이 사업 다각화를 앞세워 회사돈을 석연치 않은 곳에 대규모로 투자했다는 게 논란의 핵심이다.
금융 당국의 핵심 관계자는 31일 한겨레에 “고려아연이 투자한 원아시아파트너스 펀드의 손상차손을 재무제표에 적절히 반영했는지 살펴보고, 이그니오홀딩스(고려아연이 인수한 폐기물 재활용 업체)도 투자액이 과다하다는 지적이 있다. 고려아연 쪽에 자료를 요청해 같이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손상차손이란 자산가치가 장부가보다 현저히 낮아질 경우, 장부가격에서 회수 가능액을 뺀 금액을 재무제표에 손실로 반영하는 것이다. 고려아연이 펀드 투자에서 발생한 손실액을 적정하게 반영하고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얘기다. 금융감독원은 조만간 고려아연의 회계 감리 개시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시장의 의구심을 사는 건 고려아연이 신생 사모펀드 운용사인 원아시아파트너스의 사모펀드에 사실상 ‘몰빵 투자’를 해서다. 금감원 업무 자료와 고려아연의 감사보고서 등을 보면, 원아시아파트너스는 2019년 설립해 지난해 말 기준 펀드 8개를 만들었다. 이 펀드들의 전체 출자 약정액 6938억원 중 고려아연이 출자를 약속한 금액이 6041억원(87.1%)에 이른다. 코리아그로쓰·저스티스·탠저린·그레이·하바나 제1호 등 펀드 5개는 고려아연 지분율이 99%를 웃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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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아연의 원아시아 펀드 투자 배경에 최 회장 개인의 ‘사적 인맥’이 엮여있다는 점은 의구심을 높이는 또 다른 대목이다. 원아시아의 지창배 대표는 최 회장과 학창 시절 동창으로 알려졌다. 지 대표는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지대섭 전 의원의 아들로, 자신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고려아연과 관련된 각종 편의를 해결하면서 최 회장에게 펀드 투자도 권유했다고 한다. 고려아연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당시 회사 내부에서도 원아시아 펀드 투자에 반대하는 견해들이 있었지만, 최 회장이 직접 투자를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원아시아 펀드로 흘러들어간 고려아연 돈은 본업과 무관한 곳에 주먹구구식으로 쓰인 흔적이 적지 않다. 당장 원아시아파트너스가 최초로 만든 코리아그로쓰 1호에 출자한 고려아연 자금은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아크미디어 전환사채(CB) 투자 및 인수자금 등으로 사용됐다. 지 대표가 고려아연 돈으로 이뤄진 펀드 자금을 자신이 회장인 엔터 회사에 ‘셀프 투자’한 셈이다. 이는 과거 라임자산운용 사태 등과 닮은 꼴이다. 물론 셀프 투자 그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지난해 검찰 조사를 통해 지 대표는 2019년 고려아연이 원아시아 펀드에 100억원을 출자한 직후 이 돈을 자기 계좌에 송금해 유용하고, 수사가 시작되자 뒤늦게 자금을 돌려놓은 정황이 덜미잡힌 것으로 전해졌다. 고려아연이 1천억원 이상을 출자한 하바나 1호 펀드는 지난해 카카오의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 인수를 위한 시세조종에 활용됐다는 의혹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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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그로쓰 1호가 최대주주인 아크미디어는 올해 3월 말 기준 누적 손실액(결손금)이 약 134억원이다. 원아시아의 또 다른 펀드인 아비트리지 1호도 이 회사 전환사채에 투자하는 등 고려아연 투자금이 지 대표의 엔터 회사 한곳에 모인 흔적이 엿보인다. 지 대표는 초고가 수입차를 타고 서울 강남구 논현동 고려아연 본사를 수시로 드나든 까닭에 이를 목격한 고려아연 직원들도 많다.
석연찮은 투자는 이뿐 아니다. 원아시아 펀드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적자 패션 플랫폼 자회사인 그레이고를 떠안고, 온라인 여행사인 타이드스퀘어 투자 실패로 고려아연이 수백억원대 평가손실과 함께 이 회사 우선주를 대신 넘겨받았다. 고려아연에 이익이 된 투자 사례를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시장에서도 고려아연이 돈을 쉽게 투자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라고 전했다.
회사 안팎에선 이런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과거 성공하지 못했던 투자 다각화, 다양화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 고려아연은 1990년대 중반 사업 다각화를 목적으로 추진한 무선 인터넷 통신 서비스 업체 에어미디어 투자 등이 실패하며 주가 부진의 원흉이라는 시장의 질타를 받아 왔다. 고려아연 역사를 잘 아는 관계자는 “최 회장의 아버지인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이 과거 고려아연 지분을 영풍 장씨 일가 쪽에 넘긴 배경도 개인적인 투자 실패 때문”이라고 전했다. 고려아연이 현재와 같은 ‘한 지붕 두 가족’ 체제의 독특한 우량 기업이 된 이면에 투자 부실의 교훈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봉화/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고려아연 본사 앞.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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