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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수)

한강의 노벨 문학상보다 더 충격을 준 노벨 화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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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옥 햇빛학교 이사장]
역사상 최초로 AI가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람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는 흥분과 열광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긴 여운을 남길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제게 더 충격을 준 노벨상이 있습니다. 화학상입니다. 2024년 노벨 화학상은 역사상 최초로 사실상 인공지능이 받았습니다. 구글의 딥마인드 대표 데미스 허사비스와 존 점퍼는 화학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두 사람은 딥마인드가 개발한 AI 알파폴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화학자가 아닌 사람이 화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건’입니다.

솔직히 이 상은 알파폴드가 받아야 합니다. 구글과 딥마인드, 알파폴드. 생각나는 게 있으실 것입니다. 네, 바로 이세돌을 이긴 바둑 AI, 알파고를 개발한 그 AI 빅테크 기업입니다.

오픈소스로 전세계에 공유된 알파폴드는 단백질 3차원 구조의 분석과 예측 시간을 단축해주는 AI입니다. 그냥 단축이 아니라 10년 이상 걸리는 시간을 단 몇 시간으로 줄여줍니다.

2023년 7월 딥마인드는 단백질 예측 모델 약 2억 1,400만 개를 알파폴드 데이터베이스(DB)에 공개했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단백질 구조입니다. 신약 개발과 생명공학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벌써 암 치료제를 비롯한 각종 난치병 치료제가 속속 임상시험을 거쳐 상용화 되기 직전에 있습니다. 일부는 벌써 나왔습니다.

2024년 노벨상은 AI가 주인공입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제프리 힌튼과 존 홉필드도 인공신경망을 이용한 기계학습, 대용량 언어모델(LLM) AI 이론을 개발한 사람들입니다.

프레시안

▲ 제미니의 AI 사업부인 딥마인드 테크놀로지스의 CEO 데미스 하사비스가 노벨상을 수상한 후 2024년 10월 9일 수요일 런던의 구글 딥마인드 사무실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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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인간의 창작 능력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어떤 견해에 사로잡혀 망상을 하기 시작하면 이상한 행동들이 연거푸 벌어지게 됩니다. 트럼프의 행동이 그렇고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윤석열과 김건희, 뉴라이트들의 이상한 행동들이 모두 다 그렇습니다.

이런 이상하고 오만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자기 안의 망상에 사로잡힌 견해들이 AGI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난무합니다. 물론 그 분들은 저의 견해를 속단이라고 반박할 것입니다.

AGI가 개발되려면 아직도 수 천일, 10여 년 이상 더 걸릴 것이라는 AI 거품론이 그렇습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들을 하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불과 몇 개월 전 오픈 AI가 AGI로 가는 5단계를 공개했다고 이전 글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벌써 3단계 에이전트(Agents) 스마트폰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1단계 챗봇(ChatBots)인 오픈 AI의 챗지피티-4가 출시되어 엄청난 돌풍을 불러일으키며 AI 시대를 연 게 2년 전인 2022년 11월 30일입니다. 2단계 추론하는 AI(Reasoners)의 데모 버전인 ‘스트로베리’가 2024년 9월 12일 공개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만에 3단계 AI 뉴스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개발 속도가 장난이 아닙니다.

AI가 인간의 창작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주장도 그렇습니다. 인공지능은 결코 사람의 창조성과 예술 창작 능력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인문학자들이 많습니다. 들뢰즈니 과타리니 이미 폐기처분된지 오래인 낡디낡은 서구 이원론에 갇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자신들조차 잘 알 수 없을 것 같은 서구 철학자들의 개념들과 언어 이론들을 장황하게 근거로 듭니다.

2016년 한국의 자칭타칭 인공지능 전문가들이 예외없이 모두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길 것이라고 예측한 것과 똑같습니다.

사회성 동물인 인간의 언어 학습과 언어 사용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뇌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이런 주장을 함부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대용량 언어모델(LLM) 인공지능의 창작품들이 지금 어떤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를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아도 그럴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업데이트되고 있는 인공지능의 개발 속도를 보았을 때 인공지능의 창작품들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오히려 두려움을 불러 일으킬 정도입니다.

인공지능에게 예술 창작을 가르치는 실험은 일찍이 인공지능 개발 초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73년 자동 이야기 시스템인 인공지능 ‘소설 작가(Novel Writer)’는 주말 파티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뉴 사이언티스트 외, 기계는 어떻게 생각하고 학습하는가, 한빛미디어, 2018)

그러나 초기의 소설 창작은 인공지능에게 미리 입력한 알고리즘으로 이야기를 만들다보니 그 방식과 빈약한 테이터의 양 때문에 결과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딥러닝의 대용량 언어 모델 이전 고양이를 학습시키기 위해 고양이는 이렇다 저렇다 개념 규정의 지시어를 넣는 방식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동서고금과 SNS 상에 올라오는 수많은 고양이 관련 글과 수백만 개의 고양이 이미지, 동영상 등을 학습한 대용량 언어모델의 AI가 나오면서 AI의 문학 창작은 급격한 도약을 하게 됩니다.

조지아 공대의 마크 리들(Mark Riedl) 팀이 2013년 개발한 AI ‘셰에라자드’는 이야기 전개를 질문을 통해 들어온 수많은 답변을 통해 학습하고 결과물을 내놓습니다. 셰에라자드는 메커니컬 터크와 같은 크라우드 소스 플랫폼을 통해 전세계 수많은 미세노동자들로부터 예컨대 은행강도라는 사건을 질문으로 던지고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시나리오의 예시를 받습니다.

런던 골드스미스대의 테레사 랴노(Teresa LLano) 팀의 ‘만약 기계(What-if Machine)’는 “만약 사람을 다치게 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폭탄이 있다면” 식으로 사람들이 흔히 어떤 개념에 뒤이어 연결시키는 자연스런 개념을 뒤집어서 이야기를 만듭니다.

패턴 인식 딥러닝의 AI가 가장 잘 수행하는 작업이 패턴(유형)으로 개념을 분류하고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 학습과 뇌 작동 방식을 모방한 것입니다. 인간 사회의 수많은 갈등 구조를 유형으로 분류하는 일은 AI가 가장 잘 하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막장 드라마를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은 AI입니다.

이미 환투기와 주식 매매는 AI가 주도합니다. AI가 쓴 뉴스가 미디어에 넘치고 넘칩니다. 당장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고 작가 노조는 파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미국 일자리의 약 13%는 제품 사용 설명서 등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연간 6,750억 달러가 넘는 수입을 올린다고 합니다. 이런 일자리 대부분을 AI가 대체할 것이고 대체하고 있는 중입니다.

벌써 미국 법원의 판결문 중에는 AI가 작성한 것도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사람과 기계가 판례와 법 조문을 놓고 다투는 단계에 진입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빛의 속도로 빠르게 바꾸고 있는 인공지능

한 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주문을 받는 영업사원들이 기업체 임직원들과 대학생들, 중고등학교 교사들 사이를 누비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지금의 디지털 청소년들은 서구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왜 당시의 지성들이 백과사전 편찬에 매달렸고, 그것이 어떻게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켰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구글 검색이 정말 빠르게 AI로 대체되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는 못하는 ‘AI 맹’은 너무나 많습니다. 오픈 AI의 샘 올트먼조차도 2023년 2월 포브스 지와의 인터뷰에서는 AGI 도달은 아주 ‘느린 이륙’이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그 시간을 대폭 줄여 '1천일 이내'라고 에세이에 적었습니다.

그만큼 최초의 AGI 창조자가 되기 위한 치열한 개발 경쟁은 AGI 등장 시기를 기하급수로 앞당기고 있습니다. 댄 헨드릭스, 존 그레이 등은 '인류'라고 지칭할 수 있는 단일한 집단 행위자들이 없기 때문에 경쟁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댄 헨드릭스는 자연선택의 진화는 결국 초지능으로 인한 호모 사피엔스 멸종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예견하기도 합니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AGI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AI 버블을 주장하는 AI 과학자-개발자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은 어쩔 수 없이 대전환의 문턱을 넘어, 쓰고 싶지 않은 비유지만 꾸역꾸역 레밍 무리들처럼 AGI의 세상을 향해 밀려가고 있습니다. 그곳이 절벽일지 대평원의 낙원일지 인간과 똑같이 언어를 사용하는 AGI의 집단자살 핵전쟁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AI의 창작물은 지금으로서는 ‘결과물’이라고 명명하는 게 더 정확합니다. 프롬프트 질문에 대해 확률로 연산한 수학 계산의 결과물입니다. AI가 만든 시는 확률 숫자입니다. 초지능이 등장해 인간의 정렬을 벗어나 자의식을 갖고 스스로 판단해 창작품을 만들어도 연산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창작 작품도 인간지능의 언어 선택 확률 게임을 통한 계산의 결과물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컬럼비아대학교 영문학과 부교수인 데니스 테넨(Dennis Yi Tenen)은 그의 신간 로봇을 위한 문학 이론Literary Theory for Robots에서 사람이 언어로 작품을 창작하는 방식과 기계가 글을 쓰는 방식은 유사하다고 지적합니다.(사만드 수브라마니언, AI, 그리고 인간 작가의 종말, 파도, 2024.06.14.)

인공지능이 쓴 영화 시나리오가 사람이 작성한 영화 시나리오보다 훨씬 더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AI와 인간의 차이점

인공지능이 창작한 시와 사람이 창작한 시의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화성에서 가장 큰 분화구인 헬라스(Hellas) 분지와 백두산 천지를 비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근대 과학의 세계관은 헬라스 분화구는 백두산 분화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고 깊지만 동일한 성질의 분화구라고 설명합니다.

아닙니다. 백두산 분화구에는 한때 지구별에서 번성했던 공룡들의 죽은 체세포 분자들과 캄프리아기 대폭발 때 번성했던 삼엽충들의 외골격 세포 분자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과거 식물들의 잎에서 들락날락하던 산소와 탄소 분자들도 있습니다. 화성의 분화구에서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곧 인공지능이 만든 시와 인간이 창작한 시를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인공지능의 시와 사람의 시는 전혀 다른 세계의 시입니다. 같은 인간 언어지만 출처와 주민등록 지문이 다른 시입니다. 그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지금부터 길러야 합니다. 그런 능력은 오직 글쓰기와 책읽기를 통해서만 길러질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언어를 사용하는 기계입니다. 사람은 지구별 생태계에 통합되어 있는 생명체입니다. AI와 인간의 가장 큰 자이점은 AI는 기계, 인간은 생명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신으로 떠받쳐지는 시대라고 해도 생명에 대한 정의와 개념 규정을 새로 바꾸지 않는 한 이 점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하게 이 우주와 지구별 생태계에 통합된 소우주 그 자체입니다. 지구별 생명체는 모두 서로 함께 연결되어 존재하는 ‘하나’입니다.

AI와 사람의 창작품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호머와 셰익스피어, 김삿갓과 황진이, 나가르쥬나와 원효 등 무수히 많은 자아를 함께 갖고 있는 ‘복합 자아’, 아니 이 개념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개념을 뛰어넘어 전혀 차원이 다른 자의식인 초지능은 지금 여기 지구별 생태계에 연결되어 있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인간은 글을 쓰면서 매 순간 언어를 선택할 때 몸과 마음 속에서 우주의 빅뱅과도 같은 생명체의 폭발, 삶의 기적과 고통, 죽음의 언어 폭발을 겪으며 다음 언어를 선택합니다. 인공지능은 지금은 매순간 약 3천억 개의 언어 덩어리를 연산해서 확률로 언어를 선택합니다. 약 100조 개에 이르는 인간 뇌의 시냅스 수만큼 인공지능의 용량이 늘어나도 작동 방식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강의 문학작품 읽기, 생명으로 깨어나기

인간 사회의 모든 개념, 아름다움, 진실 등은 실제로는 만들어진 개념, 만들어진 형상, 붓다의 연기법 언어로는 상카라(sankhara, 行)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섹시’, ‘미모’ 등의 기준은 인종과 지역, 시대와 문화, 세대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그리고 이런 개념에 불과한 아름다움에 집착하게 되면 개인과 사회의 그 모든 탐욕과 고통, 갈등은 끊이지 않고 이어집니다.

문학 작품은 이같은 인간의 느낌과 생각, 행동과 의지, 분별(受想行識)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언어라는 거울입니다.

글쓰기는 문자 메시지, 메모, 엽서 등 아무리 하찮은 작문조차도 인간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뇌과학 연구는 단어의 정확한 철자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책읽기 능력도 급속하게 향상되고 책읽기 습관도 형성된다고 말해줍니다. 물론 글쓰기를 잘 하려면 책읽기는 필수입니다.

손으로 글을 쓰면 새로운 정보가 뇌에 각인되고, 더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연구 결과는 무수히 많습니다. 칠판이건 공책이건 노트북이건 글쓰기를 하면 사색을 하게 됩니다. 검색에서 사색으로 옮겨가면 도파민 중독으로 쪼그라 들었던 뇌세포가 다시 살아납니다. 명상을 하면서 내면을 들여다보고 알아차림 훈련을 하면 더 확실하게 살아납니다.

글쓰기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줍니다. 다른 사람들 또한 답변의 글쓰기를 통해 내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이 과정은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더 잘 이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게 해주는 내면 성찰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런 소통과 성찰의 힘이야말로 지구별 생태계에 연결된 생명체 인간의 사람다움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런 글쓰기와 책읽기의 사색과 성찰을 검색과 파블로프의 반응과도 같은 도파민 중독 AI에 빼앗긴다면 인간은 생각도 자의식도 없는, 그저 기계의 노예로 전락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손편지 쓰기가 AI 시대에는 최첨단 소통 수단이자 이웃 생명체와 연결되는 가장 확실한 접촉입니다.

롤랑 바르트를 비롯한 서구 문학 이론가들이 문학 작품이란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비로서 작품으로 등장한다는 독자 수용이론을 편 적이 있습니다. 붓다가 말한 언어 개념과의 접촉(觸, phassa)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글쓰기와 책읽기는 단순한 수용을 뛰어넘습니다. 한강의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한강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작가와 소통하고, 한강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한강의 세계관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생명으로 연결하기’, ‘생명체로 깨어나기’의 실천입니다.

인간 시의 처음이자 끝, 선시: 뒷것 이문재의 선시

더글러스 러미스의 래디컬 데모크라시 리뷰(「윤석열-이재명의 제왕정치, 둘 다 싫다! 그러면?」, 프레시안, 2024. 8. 11.)에서 저는 번역자 이승렬을 러미스 알리기의 뒷것이라 부른 바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승렬은 ‘녹색평론과 김종철의 뒷것’이었습니다. 녹색평론과 김종철을 보이지 않게 후원한 숨은 조력자이자 이것저것 뒤치다꺼리를 많이 한 편집자문위원이었습니다.

녹색평론과 김종철의 또 한 사람 뒷것이 이문재 시인입니다. 이문재는 시사저널 기자로 일하면서 다른 어떤 미디어보다 녹색평론 알리기 기사를 많이 썼습니다. 녹색평론을 홍보하고 구독자 수를 늘리기 위해 누구도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뒤에서 김종철과 녹색평론을 도왔습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가 녹색평론에서 출판되자 소설가 김성동에게 서평을 쓰게 한 사람도 이문재였습니다. 이 서평 덕분에 오래된 미래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의 시작이자 끝은 선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붓다의 오도송(悟道頌)을 비롯해서 수많은 선사들의 선시는 수많은 중생들과의 소통과 가르침의 언어 나누기, 공유의 언어 자비행입니다. 인간 삶의 고통과 기적, 세상의 모습에 대한 깨달음을 언어라는 뗏목에 태워 강 건너로 건너가기 위한 교통수단입니다.

이문재의 시는 대부분 선시입니다. 선 명상을 수행하는 것 같지 않은데, 주로 술을 마시면서 선수행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문재의 술을 선주(禪酒)라고 부릅니다.

뒷것 이문재가 뜬금없이 다른 사람들의 기도문(祈禱文)과 시를 엮어 책을 펴냈습니다. 좀 놀랐습니다. ‘스탄’(우즈베키스탄) 동네를 비롯해서 바쁘게 여기저기 외국도 갔다오고, 내년이면 해방되는 대학 강의에, 평생 쫒기는 글빚 원고 마감에, 거기다 1박2일 선주(禪酒) 퍼마시기까지 그렇게 바쁜 일정 어느 틈에 이런 ‘사건’을 일으킬 여유가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책을 열어보니 이문재의 선시를 닮거나 비슷한 선시들 모음입니다. 아마도 선주 마시면서 떠오르는 시를 모아놓은 모양입니다.

독일인들이 가장 애송한다는 라이너 쿤체의 시 「은엉겅퀴」의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를 ‘그림자 안에서’로 교정까지 봐 책의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그만큼 아주 세밀하고 꼼꼼하게 하나하나 두레박으로 시를 건져 올렸습니다.

초지능이 성큼 일본만화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거대한 괴물처럼 인간 언어개념의 닫힌 성 밖에서 우뚝 솟아나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시절입니다.

선사가 아니면서 선시를 쓰는 이문재 시인의 당신의 그림자 안에서 빛나게 하소서는 책을 펼쳐 든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살아있는 생명체 이문재의 마음입니다.

초지능이 만든 시와는 전혀 다른 인간의 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시가 인간의 시와 구별이 힘든 때가 도래하기 이전에 꼭 읽어보아야 할 흔치 않은 책입니다.

부디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생명체인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귀중한 시간을 함께 공유해 보시기를!!

* 이 글은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웹진 나비에 동시 게재됩니다.

[박승옥 햇빛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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