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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화)

[이응준의 포스트잇] [38] 우연과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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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길고양이 한 마리와 마주보았다. 집 밖의 모든 게 얼어붙는 겨울이 조만간 몰아칠 텐데, 고통과 죽음이 자비롭기를 기도하고 눈을 뜨니, 사라지고 없다. 한 가수가 젊어서는 제일 혐오했던 단어가 ‘운명’이었지만, 늙고 나니 아무래도 운명은 있는 거 같다고 해서 인상 깊었다.

6·25전쟁 직전 이북에서 인민재판 끝에 총살을 기다리는 줄에 서게 된 스무 살 여인이 있었다. 정신이 혼미했는데, 어떤 손 하나가 그녀의 손을 잡더니 그 줄 바깥으로 이끌어냈다. 그녀는 곧장 혼자 38선 이남으로 내려와 60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궁금했던 것은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이며 왜 자신을 구원해줬느냐는 거였다. 그녀는 이 두 가지 질문을 합쳐서 ‘운명’이라고 불렀다.

1945년 2월 13일부터 연합군은 독일 드레스덴을 사흘 밤낮 폭격했다. 원폭 수준이었다. 지하 고기저장고에 수감돼 있던 미군 포로 커트 일병은 불길이 사그라든 뒤, 도시와 시민들 전체가 본드처럼 녹아 눌어붙어버린 폐허 위로 기어올라왔다. 그런 불지옥에서도 살아남은 소설가 커트 보니것이 2007년 맨해튼 자택에서 ‘고작’ 계단에서 넘어져 구른 후유증으로 죽었다.

1917년 ‘2월혁명’으로 로마노프왕조가 붕괴되자, 취리히에서 망명 중이던 레닌은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들어와 혁명을 이어간다. 한데 7월 4일부터 신문들을 중심으로 레닌이 독일 스파이라는 얘기가 퍼져나간다. 볼셰비키들이 체포되고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한다. 이대로였다면, 러시아혁명은 온건한 혁명, 부르주아혁명 정도로 정리됐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그때 코르닐로프라는 장군이 우파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볼셰비키와 대중에 의해 48시간 만에 실패하고, ‘그 덕에’ 레닌은 복귀해 ‘10월 혁명’을 완성한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총격 살해한 19세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는 1918년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짓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는 소리를 듣고는 ‘황당해했다고 한다’. 베를린장벽은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선전담당 비서 귄터 샤보브스키의 헛소리 한 방에 1989년 11월 밤 무너졌다. 그 전까지 독일 통일을 예상했던 개인이나 조직은 지구상에 ‘없었다’.

이런 예들은 각자의 삶과 역사 속에 끝이 없다. 우연과 운명은 뫼비우스의 띠로 이어져 있다. 새 시대가 열리는 경계에서는 상징이 먼저 발생하고, 훗날 사람들은, 아, 그때 그게 그거였구나, 한다. 운명에만 매달려서도 안 되고 우연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길고양이가 누군가의 손길에 이끌려 사람의 집에서 겨울을 나기를, 그 사람도 그 작은 일로 구원받기를 나는 나의 우연을 위해 우리의 운명처럼 기도해본다. 난세에는 코미디언이 비극을 연기하고 해괴한 캐릭터들이 꼴값을 떤다. 한국 정치 이럴 때인가.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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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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