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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월)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판도라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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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서양의 신화적 전통에 따르면 세상 최초의 인간 여성은 추가적인, 그리고 해로운 존재다. ‘이브’ 또는 ‘하와’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창조주가 아담의 갈비뼈를 떼어 만든 그의 반려자다. 그녀는 유혹에 빠져 아담을 끌어내린 원죄의 장본인이다. 그래도 이브는 산통의 벌을 받고 모든 인류의 어머니가 된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는 한 치도 모성적인 특징을 지니지 않은 사악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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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는 단지 열면 안 되는 상자를 열어 재앙을 가져온 순진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신화의 경전이라 불리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판도라를 ‘칼론카콘(kalon kakon)’, 즉 ‘아름다운 해악’이라고 명했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 대가로 분노에 찬 제우스 신이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줄 계획으로 창조한 존재가 바로 여성인 것이다. 제우스는 공예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에게 명령해 매혹적인 여성의 모습을 진흙으로 빚어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올 기만적이고 수치스러운, 그리고 조작적인 성격을 넣게 했다. 그리고 올림포스 신들이 하나하나 그녀에게 선물을 했다. 헤르메스에게서 교활함과 훔치는 본성을, 아테나에게서는 수를 놓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받았고, 아프로디테는 우아함과 몸과 마음을 애타게 하는 잔인한 성격을 선사했다. 그녀의 이름이 판도라(pan=모든, dowra=선물)인 이유다.

문학적 출처만 보면 판도라를 악평에서부터 구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다름 아닌 파르테논 신전 안에, 거대한 금과 상아로 만든 아테나 여신상 받침돌에 판도라의 탄생을 기념하는 부조 조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도기화 및 다른 예술품에서 선보이는 판도라의 탄생 장면도 틀림없는 찬양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재앙을 가져온 존재로서가 아닌 아테나 여신에게서 선사받은 수공예의 어머니로 창조적인 여성형이 예술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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