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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 (일)

‘채식주의자’ 헝가리어판 번역한 김보국 교수, 헝가리 공로훈장[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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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가지 않는 힘든 길 걸어온 ‘음지의 학자’

헝가리 문학 작품을 한국어로도 번역해 소개

헝가리국립문서보관소에서 한반도 관련 자료 수집

경향신문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헝가리어로 번역한 김보국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가 헝가리 공로훈장을 받는다. 사진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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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헝가리어로 번역한 김보국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가 헝가리 공로훈장을 받는다.

주한 헝가리문화원인 리스트문화원은 27일 헝가리 문학의 고전 작품들을 한국어로 번역한 김 교수의 업적을 인정해 헝가리 국가 최고 훈장 중 하나인 기사십자훈장을 수여 한다고 밝혔다. 문화원 측은 김 교수가 남북한 관련 헝가리 자료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해 온 공로도 함께 언급했다.

김 교수는 경향신문과 전화 인터뷰에서 수훈 소감에 대해 “나는 항상 뒷길로 다녀온, 음지의 연구자라 훈장을 받는다는 소식이 기쁘면서도 부담감을 느꼈다”고 했다.

실제로 김 교수는 크게 주목받지 않는 분야에 수십 년간 몰두해 온 학자다. 한국외국어대에서 헝가리어를 전공한 후 헝가리 외트뵈시롤란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한국에서는 낯선 헝가리 문학을 한국에 알리고, 한국 작품을 헝가리에 소개하는 양국 문학의 가교 구실을 해왔다. 헝가리 대표 문학 작품인 <여행자와 달빛>, <세렐렘>, <장미 박람회>, <도어>를 한국어로 번역했고, 한국 대표 문학 작품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채식주의자>를 헝가리어로 옮겼다. 이 뿐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채 헝가리 국립문서보관소에 쌓여있던 한반도 관련 자료를 12만장 넘게 수집했고, 이를 연구한 결과물로 <헝가리 외교기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들>, <헝가리의 북조선 관련 기밀해제문건>(공저) 등을 출간했다. 2021년 헝가리국립문서보관소의 요청으로 동아시아연구소 소장을 맡아 한국과 헝가리를 오가며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다양한 활동을 이어온 김 교수에게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번역은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헝가리 출판사의 제안으로 번역을 맡게 됐습니다. 한국어본과 영어본을 둘 다 살펴봤는데 영어본을 크게 참고하지는 않았어요. 헝가리와 한국 간의 문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원문을 최대한 살려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죠. <채식주의자>는 3개의 이야기로 구성돼있는데, 모두 새라는 모티프가 등장합니다. 이 모티프를 어떻게 살려서 전체 맥락에 넣을지에 가장 공을 들였습니다. 출간 후 헝가리 유명 독서사이트 ‘모이’의 댓글을 살펴봤는데, 대부분 좋은 내용이었어요. 기존에 헝가리에 번역된 동양 작품은 메디테이션(명상)이나 몽환적이고 모호한 내용이었는데, 채식주의자는 현대적 작품이라는 평가가 많았죠.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오히려 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채식주의자>는 2017년 헝가리 첫 출간 당시 초판이 다 팔렸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품귀 현상이 빚었고, 중고 서적 판매 사이트에는 원가보다 10배 가까이 올랐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도시 재개발이란 무거운 사회 문제를 담고 있음에도 초판이 완판될 정도로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김 교수는 헝가리 문학도 한국 독자에게 매력적 요소가 많다고 설명했다.

“헝가리 문학은 사실주의적 경향이 뚜렷합니다. 제가 번역한 <여행자와 달빛>은 사실주의면서도 상상적 요소가 절묘하게 가미돼있죠. 헝가리 문학은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혁명에 앞장선 작가들이 이후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검열과 탄압을 견뎌야 했습니다. 문학가들이 검열을 피하기 위한 묘책을 많이 내놓았어요. <장미 박람회>의 작가 외르케니 이슈트반도 오랫동안 작품 활동의 제약을 받았는데, 검열을 피하려고 엄청나게 압축해서 썼죠. 헝가리에서는 이런 작품을 ‘1분짜리’라는 장르로 따로 분류합니다.”

김 교수는 사용 인구가 적은 소수 언어의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작품수가 적다 보니 전문 번역가가 탄생하지 못하고, 신진 번역가들이 배울 기회도 적어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했다.

“르네상스를 만든 것도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대 그리스 문화유산이 아랍으로 넘어가고, 또다시 여러 언어로 번역돼 알람브라(스페인), 피레네산맥을 넘었습니다. 원문이 7~8단계를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됐죠. 그러나 고대 그리스 원문이 어떻게 되는지 원류를 쫓아가는 기류가 형성됐고, 이런 흐름이 르네상스를 만들었어요. 드라마 <대장금>의 헝가리어 버전 앞부분 번역에 참여했었는데, 한국어 대본이 아니라 영어판으로 번역이 이뤄지다 보니 원래 내용이나 의미와 달라진 게 많았습니다. 한국 정부 차원에서 소수 언어 문학에 힘을 많이 실어줬으면 합니다.”

김 교수는 향후 계획을 묻는 말에도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답했다. 그는 “헝가리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동아시아 연구소가 비셰그라드 4국(헝가리·체코·폴란드·슬로바키아) 전체를 아우르는 동아시아 관련 자료 센터로 확대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면서 “일단 자료를 많이 모아두면 똑똑한 신진 학자들이 잘 활용해 주지 않겠냐”며 웃었다.

수여식은 28일 오전 리스트문화원에서 열린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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