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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토)

'멜서스의 덫'은 과거 이야기인가…인구 변화로 읽는 역사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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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기협 역사학자


역사 연구에서 인구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가 처해 있던 상황을 보여주는 하나의 명확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대체로 살기 좋은 형편이었음을 보여주고, 인구 감소는 기아, 질병, 전쟁 등 참혹한 상황을 반영한다. 그리고 국가 간 경쟁에서 우열을 가리는 기본요소 하나가 인구이기도 하다.

중요한 지표인데도 데이터의 한계 때문에 활용에도 한계가 있다. 중국처럼 일찍부터 치밀한 호구조사가 중요한 국가사업으로 자리 잡은 곳에는 많은 데이터가 쌓여 있는 반면 유럽에서는 중세기 이후 교회의 출생-사망 기록이 어렴풋한 추정의 실마리가 되는 정도다. 국가나 교회 같은 제도가 안정되어 있지 않던 사회의 인구에 관해서는 그만한 실마리도 없다.

20세기 과학 발전이 역사학 연구자료의 확장에 크게 공헌한 영역의 하나가 인구 추정이다. 50년 전 내가 역사 공부를 시작할 때에 비해 믿을 만한 인구 추정의 범위가 크게 늘어났다. 폴 몰랜드의 〈인구의 물결〉(2019)이 그 성과를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

중앙일보

Paul Morland, The Human Tide: How Population Shaped the Modern World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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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이 가져온 인구 변화



“인구는 어떻게 근대세계를 만들어냈나?”란 부제의 〈인구의 물결〉은 산업혁명을 전후한 인구 변화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19세기 초반의 영국(잉글랜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국이 근대 인구 확장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이 산업혁명의 선두주자였다는 사실과 맞물린다.

〈위키피디아〉에 정리되어 있는 세계인구 추이를 보면, 기원전 4000년까지는 7백만 명 선에 머물러 있다가 1천 년에 갑절씩 늘어나기 시작한다. 5천만 명 선에 이른 기원전 1000년경부터는 5백 년마다 갑절씩 늘어나 기원후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2억 명 선에 이른 후 증가세가 둔화되어 1500년경 4.58억 명에 이르고 1800년경 10억 명에 이른다. 그 후에는 증가세가 격화되어 2백여 년 동안에 8배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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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기자


기원전 4000년 이후의 인구 증가 추세를 농업혁명의 효과로 본다면 그 효과는 1800년경까지 지속된 셈이다. 5백 년 내지 1천 년 기간에 인구가 갑절씩 늘어나는 상황이 5천여 년간 이어진 것이다. (마지막 3백 년간 조금 빨랐던 것은 다음 단계 산업혁명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농업기술의 완만한 발전과 확산 과정을 보여주는 단계다.

인간 존재 양식의 큰 변화로 5천년 전의 농업혁명과 근세의 산업혁명이 꼽히는 이유가 인구 추이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인류는 석기시대에 이미 지구상의 거의 모든 육지에 자리 잡았으나 그 개체수는 오랫동안 5백만 전후에 머물러 있었다. 농업혁명 이후 500~1000년마다 갑절씩 늘어나기 시작해 5천년 동안 거의 100배로 늘어난 것은 하나의 ‘대폭발’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시작된 가속 상태 앞에서는 이 대폭발도 마치 정체 상태였던 것처럼 보인다.

인구의 규모와 밀도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는 방식이 몰랜드의 책에 폭넓게 그려져 있다. 산업화 진행 과정에 초점을 맞춘 책이지만 다른 상태의 사회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맬서스의 덫’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일까?



인구 폭발의 이유로 의료와 위생의 발전 등 여러 가지가 지목되지만 가장 기본 요인은 식량 공급의 확대다. 채집경제 단계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 식량의 획득에 매달려 지냈다. 농업의 발달과 확산에 따라 인구의 상당 부분이 식량 생산활동을 벗어나 도시를 형성했다. 산업화 사회에서는 직접 식량 생산에 종사하는 인구가 10% 수준으로 떨어졌다.

농업혁명 이전의 인류가 자연이 제공하는 자원을 ‘얻어먹는’ 단계였다면 농업시대에는 ‘찾아 먹는’ 단계로 나선 셈이고, 산업화시대에는 ‘뺏어 먹는’ 단계에 이른 셈이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긴장이 늘어나고 지속가능성 문제가 제기된다.

이 긴장관계를 처음으로 밝혀낸 것이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1798)이다. 자연의 식량 공급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에 이르면 전쟁이든 질병이든 인구를 줄이는 길이 인구의 압력에 의해 나타난다고 했다. 이 한계에 ‘맬서스의 덫(Malthus’ trap)‘이란 이름이 붙었다.

몰랜드는 인류가 산업화를 통해 이 한계를 돌파했고, 그 돌파가 이뤄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점에 그 한계가 밝혀진 것이 기묘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책을 계속 읽으면서는 과연 맬서스의 덫이 돌파된 것일까? 의문이 떠오른다.

책 제목에 “물결(tide)”이란 말을 쓴 것은 확장과 수축이 반복되는 현상의 표현이다. 19세기 전반 잉글랜드에서 시작한 인구 팽창의 물결이 19세기 후반 유럽의 많은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20세기 중에 온 세계로 확산되었다. 팽창이 일찍 시작된 유럽은 밀려들던 물결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다른 지역도 차츰 이를 뒤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맬서스의 덫이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라 틀을 키워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동남아의 인구밀도가 낮았던 이유



앤서니 리드는 〈갈림길의 역사-동남아시아〉에서 1600년경의 동남아 인구를 2500만 명 이하로 추정한다. 당시 세계인구의 약 5% 선이다. 지금의 동남아 인구는 6.76억 명으로(2021년), 전세계의 9%에 가깝다. 지난 400년간 인구가 비교적 많이 늘어난 지역의 하나다.

중앙일보

김영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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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는 1600년경까지 동남아 인구가 기후-지형 조건이나 농업의 긴 역사에 비해 적다는 사실이 설명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그가 떠올리는 가장 큰 이유는 지질학적 불안정성이다. 잦은 대형 화산폭발과 지진, 해일이 인구 확대를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1600년 이후 자연 재해의 규모와 빈도가 그 이전보다는 줄었기 때문에 근세의 인구 증가가 커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덧붙인다.

잦은 자연재해가 종족 다양성의 원인도 된 것으로 리드는 본다. 연재 초입에서 (제4회) 루손섬 오지 아에타(Aeta)족의 흥미로운 현상을 소개한 바 있다. 태풍 등 재해로 생존 조건이 위협받을 때 인근 주민들이 아에타족과 특별히 많이 결혼하는 것은 생존의 노하우를 잘 갖춘 아에타족에게 의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지질학적 재해가 잦은 지역은 동남아 도서부에 많다. 동남아 전체를 놓고는 자연재해가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리드는 두 가지 이유를 더 내놓는다. 하나는 1만년 전 빙하기보다 해수면이 50 미터 가량 높아져 초기의 인류 서식지가 바다 밑에 들어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열대기후로 식생이 빽빽해서 농업을 위한 개간이 힘들었다는 것이다.

해수면의 상승은 오래된 일이고 완만히 진행된 변화라서 적절한 이유 같지 않다. 식생이 빽빽한 조건은 다른 열대지역에서도 농업 발달을 억제한 요인이 분명하다. 동남아가 인류 정착이 빨랐던 곳인데도 인구밀도가 낮았던 이유는 열대기후와 지질학적 위험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역의 활성화가 촉발한 인구 증가



위에 인용한 데이터들의 신뢰도를 나는 확실히 판단할 길이 없다. 50년 전보다 많이 좋아진 것은 분명하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는다고 옛사람은 말했다. 마음 놓고 마실 수는 없어도 세수는 할 만한 물이 지금은 넉넉히 나오는 것 같다.

리드는 1600년경 동남아 인구의 추정을 위해 17세기 이후 꽤 넓은 영역을 정확히 파악한 스페인인과 네덜란드인이 남긴 데이터로부터 변화 추세를 역산(逆算)하고 16-17세기 여행자들의 기록을 참고했다고 한다. 쉽게 이용할 만한 데이터는 모두 유럽인 도래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1600년 이전 동남아의 인구 추이는 추측할 근거가 극히 적다.

농업생산력 자체가 크게 늘지 않아도 교역의 활성화가 인구 증가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19세기 초 영국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료와 농기구 등 산업혁명의 성과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시점에서 영국의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린 것은 신대륙의 곡물이었다. 1815년 제정된 곡물법(Corn Laws)이 당시 영국에서 해외 곡물 수입이 얼마나 심각한 정치-사회적 의제가 되어 있었는지 보여준다.

동남아 지역에서도 11세기 이후 ’통상의 시대(Age of Commerce)‘에 곡물 시장이 대형화하면서 인구 증가가 빨라졌다. 큰 강 하류의 곡창이 개발되어 확대되는 상공업 지역에 식량을 제공했다. 운송 화물이 소량의 귀중품에서 식량 등 생필품으로 커지면서 큰 선박이 만들어지고 식량 생산지를 낀 교역항이 중요하게 되었다.

16세기에 유럽인이 나타난 후 남양의 변화에서 유럽인의 역할만이 오랫동안 중시되었다. 남양에는 남양 고유의 흐름이 16세기 이전에나 이후에나 계속되고 있었고 유럽인이 일으킨 변화는 수면의 물결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근래 자라나고 있다. 인구 추이는 물밑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창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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