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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토)

[기자의 시각] 노벨평화상과 합천의 피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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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경남 합천에 있는 원폭 피해자 복지회관. 1945년 미군의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당시 현지에 있었던 한국인 피폭자들이 모여 산다./합천=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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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 원폭 피해자 복지회관을 처음 찾은 건 대학생이었던 2018년 8월의 일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미군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 피폭된 한국인들이 사는 곳이다. 방문 전까진 한국인 피폭자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피폭 1세’ 노인들에게 원폭 투하 날의 이야길 들었을 땐 슬픔보다 생경함이 앞섰다. 함께 간 일본인 친구가 한 할머니의 증언을 들으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는 내 과문을 탓하기도 했다.

일본 피폭자 단체 ‘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 협의회(피단협)’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지난 11일, 응어리처럼 남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지난 15일 새벽 차로 합천에 갔다. 6년 전 만난 어르신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건립 당시 110여 명이 입주했는데 지금 남은 분은 67명이라고 한다. 피폭 1세 정원술(81)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은 “평균 나이가 85세로 해마다 10~15명씩 죽는다”고 했다.

이날 만난 피폭 1세 노인들은 피단협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을 알지 못했다. 행여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두 전쟁’ 소식에 충격받을까 봐, 회관 TV는 뉴스를 좀처럼 틀지 않는다. ‘6년 전 온 그 학생’이란 말에 손주 보듯 환대해주는 이들을 보고 ‘핵전쟁 위험이 도사리는 지금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은 꺼낼 수 없었다.

입주자 중 가장 건강한 편이라는 김도식(91) 할아버지는 귀가 나빠 질문이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 취재 수첩에 ‘건강하세요’란 글을 써 보여주고 회관을 나서려는데, 한쪽 벽에 붙은 그림 편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피폭자들이 올여름 한글 공부 시간에 쓴 ‘나에게 보내는 연서(戀書)’였다. ‘잘 살아왔으니 이대로 잘살자 경남아. 참아줘서 고마워’ ‘공부한다고 수고맛(많)다. 행복하여라’ 같은 편지를 읽고 한참을 먹먹하게 서 있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피단협의 평화상 수상 소식을 전하며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증언의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했다. 이날 정 회장도 비슷한 이야길 했다. “사실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는 건 괴로운 일이에요. 이제 와서 우리가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겠어요. 그저 80년 전 우리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생명들이 핵전쟁에 희생되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길 바랍니다. 피단협이 노벨상을 받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 거예요.”

지금 이 시간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 단체) 전장에선 죄 없는 생명들이 희생되고 있다. ‘핵전쟁도 감수하겠다’는 핵 보유국들의 위협에 가장 씁쓸해할 이는 먼저 세상을 뜬 피폭자들이 아닐까. 피단협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이 저세상까지 닿았다면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줬길 바란다. 언젠가 다시 합천을 찾아 ‘이제야 핵 없는 세상이 왔다’며 어르신들과 떠들 날이 오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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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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