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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목)

[오늘과 내일/장택동]국회가 헌재를 멈춰 세울 권한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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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장택동 논설위원


헌법재판소가 헌법재판소법 조항에 대해 위헌 취지로 결정한 사례는 1988년 설립 이후 단 3건뿐이다. 2건은 한정위헌결정을 따르지 않은 법원 판결이 헌법소원 대상이 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세 번째가 이달 14일 나온 심리정족수에 관한 가처분 인용 결정이다. 헌법재판관 9명 중 7명 이상이 참석하지 않으면 심리를 못 열게 돼 있는 조항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킨 것이다. 17일 국회 몫 재판관 3명이 퇴임하는데도 후임자 임명이 이뤄지지 않자 자구책을 취한 셈이다.

헌재가 정족수 규정에 대해 ‘셀프 결정’을 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입법을 통해 정비하는 게 바람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재판관 공백을 불러온 국회의 책임부터 물어야 한다. 이는 ‘재판관의 임기 만료일까지 후임자를 임명해야 한다’는 헌재법을 엄연히 어긴 것이다. 그러고선 더불어민주당이 “헌재 스스로 입법 행위에 준하는 결정을 했다”고 지적한 것은 적반하장이다. 야당 탓만 하며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보여온 국민의힘도 도긴개긴이다.

재판관 선출 기한 넘긴 與野의 위법

이번 결정으로 헌재가 심리는 이어갈 수 있게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헌재의 기능은 마비된 것이나 다름없다. 헌재의 핵심적 역할인 법률 위헌 결정, 헌법소원 인용, 탄핵 결정 등을 하려면 재판관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지금처럼 재판관이 6명만 남아 있어도 결정을 내릴 수는 있지만, 실제론 한 명이라도 결원이 있는 상태에선 주요 사안에 대한 판단은 가급적 미룬다. 한 명의 의견에 따라 위헌과 합헌이 갈릴 수 있으므로 ‘완전체’가 아닌 상태에서 이뤄진 결정에 대해선 정당성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해서다.

결국 당장 이번 달부터 헌재의 주요 결정은 이뤄지지 않게 됐다. 그만큼 헌법에 어긋나는 법률이 유지되는 기간은 길어지고 기본권 침해를 구제받는 것은 늦어져 국민이 헌법재판을 받을 권리를 행사하는 데 차질이 빚어진다. 문제는 이번만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재판관 공백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재판관은 대통령, 대법원장, 국회가 각각 3명을 지명 또는 선출한 뒤 임명되는데 이번처럼 국회 몫이 제때 채워지지 않는 일이 잦다. 2018년에는 여야 간 이견으로 한 달가량 재판관 3명이 충원되지 않았고, 2011년 조대현 전 재판관 퇴임 후에는 1년 2개월간 공백이 빚어졌다.

제도 개선해 공백 생길 여지 없애야

지금대로라면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이 농후한 만큼 이를 막을 제도적 개선책이 시급하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방안이 독일, 스페인처럼 후임 재판관이 임명되지 않았을 경우 임기가 만료된 재판관이 직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국회에서도 이런 취지의 헌재법 개정안이 수차례 발의됐지만 재판관 임기를 6년으로 규정한 헌법에 어긋나는지를 놓고 의견이 갈리면서 입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제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헌재가 멈추는 것을 막기 위해 법률에 의해 재판관 퇴임 시기를 임시적으로 미루는 것은 헌법의 취지나 목적의 정당성에 비춰 용인할 수 있다고 본다.

국회 몫 재판관 3명에 대한 추천권을 정당별로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등도 명문화된 규칙으로 정할 필요가 있다. 계속 관례에 맡겨두면 재판관 교체 때마다 여야 간에 갈등이 빚어질 소지가 있다. 각 당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탄핵 심판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의 헌재 결정을 미루기 위해 고의적으로 재판관 선출을 미룰 우려도 있다. 이런 꼼수를 시도할 여지조차 남겨둬서는 안 된다. 국회가 헌재를 멈춰 세울 권한은 헌법이나 법률 어디에도 없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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