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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수)

[공감]평화로 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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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북한군의 참전 개시를 확인하는 국정원의 발표와 각 부처의 대응이 보도되었다. 외신들도 이를 인용해 보도를 이어갔다. 북한 관련 전문가들은 한국의 지혜롭고 신중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유튜브 등의 SNS에는 이미 전쟁이 임박한 듯한, 전쟁을 해야 할 듯한 극단적 발언과 가짜뉴스들도 우후죽순처럼 퍼졌다. 그럼에도 한국의 사람들은 일상을 이어갔다. 출근하고, 병원에 가고, 장을 보며 하루를 살았다. 그러나 과연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불안이 높은 사람들은 뉴스를 검색하고, 초조해했다. 답답함과 두근거림, 불면을 호소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반려동물용 피란가방을 사야 하나 고민했다고 했다. 부모님이 외국에 계신 친구는 “외신에는 심각하게 보도되니 여차하면 오거라!”라는 통화 내용을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정신건강 전문가로서 이러한 은은한 불안과 억눌린 감정들이 걱정스럽다. 한국은 70년 이상 전쟁의 상처와 공포를 안고 살아온 사회다. 안보위기가 있을 때마다 두렵고 괴롭지만, 그럴 때마다 일일이 반응하는 것 또한 유난하고 나약한 일이 되어온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전쟁에 대한 각자의 두려움과 분노를 나누지 못하고 고립되어 지쳐간다. 이 상황에서 떠오른 것은 트럼프가 전쟁을 말하던 2017년 한강 작가가 쓴 뉴욕타임스 기고문이다. 그는 이 글에서 전후 세대 한국인들은 북한을 환상처럼 느끼면서도 그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이중적 상황에 놓여 있다고 했다. 평양이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데, 이는 전쟁의 공포를 잊어서가 아니라고 했다. 수십 년간 축적된 긴장과 두려움이 무의식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필요할 때마다 불쑥 고개를 든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전쟁에 대한 무관심과 긴장이 공존하는 이 상태는 이미 트라우마의 일종이며, 우리는 그 상처를 여전히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참사와 전쟁의 피해자가 되면 두 가지 욕구에 사로잡힌다. 하나는 분노를 표출해 세상에 알리고 고발하려는 마음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일을 최대한 외면하고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 양가감정은 당사자의 정서와 신체 상태를 극단으로 몰아간다. 작은 자극에도 예민해지고 쉽게 트리거링되는 과각성 상태와, 무기력과 의욕 저하로 이어지는 저각성 상태를 오가는 것이다. 나는 휴전 상태에서 전쟁 위기와 국지전을 겪어온 한국인들이 어느 정도 이런 통합되지 않은 분열적 불안을 갖고 있다고 본다. 부모 세대의 아픔을 내면화한 채, 고통을 말해도 소용없다 여기며 참고 살아가는 이들의 트라우마를 정확히 짚어낸 한강 작가의 글이 고맙고 든든했다.

사실 나도 전쟁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작은 동향 변화에도 가슴이 철렁하고 두근거린다. 이웅평이 미그기를 몰고 귀순하며 전국에 공습경보가 울렸고, 엄마와 동생들과 함께 피란짐을 싸서 지하실로 내려갔던 순간이 내가 기억하는 유년기의 거의 첫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강 작가의 기고문과 이후 그녀가 보여주는 인간과 참사에 대한 태도는 이런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는 무서울 때 ‘무섭다’, 끔찍할 때 ‘끔찍하다’, 잔인함을 목도할 때 ‘인간은 이토록 잔인한 존재인가’라고 담담히 쓰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것이 해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려울 때 두렵다고 말하고, 안전을 원할 때 안전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누구의 편을 들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나와 주변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일 뿐.

지금의 불안을 다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과 분노를 솔직하게 나누는 것이다. 감정을 드러내고 보듬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원하는 세상과 평화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보자.

경향신문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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