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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 (화)

양심수, 동티모르, 연세대 사태…인권특종 캐낸 ‘팩스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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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개최된 범민족대회 강경 진압으로 대학생 5848명이 연행되고 462명이 구속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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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참다운 자유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실을 전달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며, 진실을 찾기 위해 본질을 파헤침에도 두려움이 없다. 뜨거운 연대와 애정은 우리의 용기를 더욱 북돋울 것이며, 날카로운 비판은 우리의 필봉을 더욱 날 선 칼날로 만들 것이다. 우리는 ‘시린 칼날’로 인권유린의 현장을 가차없이 내리칠 것이다.



‘인권하루소식’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의 한 대목이다. “‘안보’와 ‘질서’의 이름 아래 인권이 광범위하게 유린되는 사회, 우리는 감히 말하건대 소위 ‘문민정부’의 현실을 이렇게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당시의 상황을 진단했다.



이런 진단 아래 김영삼 정부의 거짓을 폭로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양심수가 없다”고 대외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인권하루소식은 창간 준비호에서부터 당시 43년째 복역 중인 김선명씨를 집중적으로 알렸고, 국가보안법 등의 이유로 3백명 넘는 양심수가 수감 중이라는 걸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를 비롯한 인권단체들이 양심수 석방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알려지고는 있었지만, 이런 자세한 소식들은 인권신문답게 자세하게 내용을 전달했다. 김영삼 정부의 최형우 내무부 장관이 “사상범에게는 고문을 해도 괜찮다”는 발언을 했다. 이런 발언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을 가했다. 고문이 사라졌다고 하면 고문 사례를 폭로했다. 정부의 거짓 홍보는 여지없이 깨졌다. 정부가 A2 2장짜리 팩스신문을 이기지 못했다. 이렇게 인권하루소식은 창간사에서 밝힌 정신을 구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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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창간호.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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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가 이기지 못한 팩스신문





인권하루소식이 아침마다 기다리는 신문이 된 데에는 단지 언론이 전하지 않는 소식을 보도했다는 점에만 있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보는 관점을 변화시켰다는 데 있을 것 같다. 인권옹호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해석하고, 취재하고, 보도했다. 그러니 언론들이 균형 잡힌 보도라는 이유로 실은 보도하기를 꺼렸던 피해자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유엔의 국제인권기준이라는 보편적 기준에 맞추어 인권피해를 드러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권단체만이 아니라 시민사회단체들이 자신들의 사건이나 행사들에 대한 제보를 해왔고, 보도해주기를 요청했다. 나중에는 우리가 찾아 나서지 않아도 취잿거리가 쌓이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보도 태도는 언론들의 보도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인권하루소식에는 세상의 어떤 언론들에서도 볼 수 없던 국제 인권뉴스들이 실렸다. 1994년에 방한한 아르헨티나 ‘오월광장 어머니회’에 대한 소개, 그때까지는 국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동티모르 독립운동’ 소식 같은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오랜 지배 속에서 거의 인종청소를 당하고 있는 동티모르의 상황은 거의 최초로 보도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마침 유엔 빈 인권대회에 참여했던 인권단체들이 1994년에 결성한 ‘한국인권단체협의회’의 국제연대 활동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는데, ‘인권하루소식’이 보도하면서 훨씬 더 많은 언론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국제사회나 유엔에서 진행되는 국제적인 논의와 소식들도 ‘인권하루소식’이 관심을 갖고 보도하면서 인권의 시야를 국제적으로 확대해갔다.



창간 10돌이었던 2003년 9월5일에 경향신문은 “‘인권하루소식’ 창간 10돌 ‘뺏긴 자의 등불’”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이 신문은 93년 김삼석·김은주 남매간첩단 조작 사건, 96년 고애순씨 교도소 내 태아 사산사건, 98년 양지마을 노숙자 불법감금 사건 등 굵직굵직한 특종을 만들어냈다. 이 밖에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 문제, 불법 검문 거부 운동 등의 소식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한때 언론사 사회부 기자들에게 이 신문은 인권 관련 뉴스의 최대 소스였다”고 평가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점차 팩스신문의 위력이 빛을 잃어갈 때까지 인권하루소식은 창간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노력을 다했다. 나를 비롯한 편집을 맡았던 활동가들, 그리고 인권현장을 뛰면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하느라 자신을 갈아 넣은 수많은 활동가들을 기억한다. 인권운동사랑방에 입사하는 활동가는 인권하루소식 기자를 거쳐야 했다. 그래서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들은 어느 단체의 활동가보다 인권현장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인권하루소식은 활동가 훈련의 중요한 역할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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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8월14일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행사와 제7차 범민족대회가 열리고 있는 연세대 교내에 투입된 경찰이 교내에서 진압작전을 펼치며 학생들과 투석전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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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사태와 인권유린 조사





1996년 8월에는 이른바 ‘연세대 사태’가 발생했다. 범민련, 한총련 등 민족자주계열 운동진영은 매년 8·15를 맞아 통일선봉대를 운영하고, 서울에서 범민족대회를 개최해왔다. 1996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제7차 범민족대회’를 열기로 했는데, 정부는 이 대회를 친북적인 대회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한총련 조직 붕괴라는 목표를 갖고 대회를 봉쇄했다.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전국에서 2만명 넘는 학생들이 연세대학교에서 집결했고, 연세대에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은 주변의 학교와 거리에서 투쟁을 이어갔다.



이전의 범민족대회 때와는 달리 경찰과 정부의 입장이 강경했기 때문에, 연세대에 집결했던 학생들은 거리 진출도 하지 못했고, 해산도 하지 못했다. 연세대에서 나오는 학생들을 속속 연행, 구속했기 때문이었다. 한총련은 8월15일, 범민족대회를 마친 다음 ‘안전 귀가 보장 시 자진해산’을 밝혔지만, 당국은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강경 진압 방침을 천명했다. 완전히 고립된 속에서 음식물은 물론 여성들의 생리대까지 반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연세대학교 과학관과 종합관 등을 점거한 학생들에 대한 강경 진압이 매일 진행되다가 8월20일 헬기까지 동원한 진압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서 과학관과 종합관에서 각각 2천명 이상의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 한명이 숨지는 사건도 일어났다. 과학관과 종합관에서 연행되지 않은 학생들은 학교 담을 넘어 인근 주택가 등을 통해 학교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정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지도부 전부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범민족대회 기간 중에 연행된 학생은 총 5848명이었고, 20일 당일에만 3499명이 연행되었다. 이 중 462명이 구속되었고, 3341명은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런 대대적인 연행과 구속 사태는 1986년의 1525명이 연행되고 1288명이 구속되었던 건국대 때보다 훨씬 규모가 커서 지금까지도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연행자와 구속자를 낳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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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가 1996년 8월 범민족대회를 강경 진압하던 가운데, 연세대에 있던 학생들이 “우리는 집에 가고 싶다”라고 쓰인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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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접하고 인권운동사랑방은 한국인권단체협의회에 제안을 해서 ‘연세대 사태 인권피해 신고센터’를 개설했다. 경찰이 저지른 인권침해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한총련 지도부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한총련 지도부는 모두 수배 중이라서 협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입장 차이도 있었다. 한총련 지도부는 ‘반통일적인 정권의 강경 진압에 맞서 항쟁을 벌인 것’이라는 입장이 강했다. 어렵게 접촉한 한총련 지도부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을 때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그런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럼, 총여학생회를 통해서 인권침해 사례를 조사하면 되지 않을까요?”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총여학생회를 통해서 조사를 한다면 가능할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그것도 쉽지 않았지만,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이들을 수소문해서 총여학생회 조직들과 선이 닿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성추행 사건을 알리고 싶어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피시(PC)통신 등을 통한 제보가 들어왔다. 이 중에 신빙성이 있는 제보자들 108명을 만나서 설문조사도 하고, 그중 10여명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인터뷰도 했다. 인터뷰 내용은 녹음을 했다. 이 조사 결과는 이후 국회에서까지 크게 주목을 받았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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