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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 (화)

[매경이코노미스트] 필리핀 '이모님'보단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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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서울시에서 필리핀 가사관리사 제도의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일·가정 양립의 필수 선결 과제는 자녀 양육 문제다. 특히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은 거의 매 순간 보호자를 필요로 하지만, 맞벌이 부모는 야근 등으로 일정이 불규칙적이어서 이에 부응하지 못한다. 맞벌이 부부가 외부 조력자 없이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비록 매일은 아니어도 때때로 가동할 플랜B는 항상 준비돼 있어야 한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라 쓰지만, '필리핀 이모님'이라 읽는 이유다.

그러나 필리핀 이모님을 데려오는 것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된다. 특히 그 혜택이 고소득층 극소수에 국한되는데 왜 행정력과 재원을 투입해야 하는지 비판적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그들의 임금을 최저임금보다도 더 낮추고 공급을 늘려 중산층 가구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인 듯하다. 그러나 이는 근로자 자격으로 데려온 외국인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합당한지, 내국인 노동시장에 영향은 없는지 등 여러 논란을 야기한다.

더 나아가 임금을 낮추고 공급을 늘려 많은 가구의 접근성이 높아진다면, 정작 본래의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저가로 수요층이 두꺼워지면 주요 시간대, 주요 일자에는 선착순이든 추첨이든 경쟁을 뚫고 사전 예약을 해야 하고, 예약에 성공하면 취소가 어렵다. 개별 맞벌이 가정은 원하는 시간과 날짜에 예약하지 못할 수도 있고, 또 일정이 불확실한 경우에는 아예 예약을 꺼릴 것이다. 결국 절박한 '찐수요자'일수록 사전에 다른 플랜C를 준비해야 하며, 이는 정책 결과물을 일·가정 양립이라는 목표로부터 괴리시킨다.

외국인 노동자에 의한 돌봄 서비스를 여러 아이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정부가 선발과 교육을 관리감독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필리핀에서 일반 대졸 여성을 선발해 가사관리사로 각 가정에 근무시키는 대신 사범대를 졸업한 여성을 '방과 후 보조교사'로 선발해 돌봄 시설에서 근무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오전에는 한국어 교육과정을 수강하도록 하고, 방과 후에는 지역아동센터 등 돌봄 시설에서 다수의 아이를 돌보도록 한다면, 그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만으로도 일·가정 양립을 위한 든든한 우군이 될 것이다.

2021년 기준 전국적으로 4295개 지역아동센터가 있고, 서울시에만도 477개소가 있다. 지역아동센터는 무료 시설이며, 이용 대상은 저소득층, 한부모 혹은 다문화 가정 등의 아이들로 제한된다. 이를 확대해 비용 분담을 전제로 맞벌이 가정 아이들도 방과 후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 누구나 이용 가능하게 하는 대신 시설 이용료를 유료로 전환하고, 기존의 이용자군에는 보조금을 지급하자. 그 재원으로 지역아동센터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 내외국인 우수 인력도 충원하자. 지역아동센터가 더 늘어날 것이고, 무수히 많은 맞벌이 가정이 혜택을 볼 것이다.

지역아동센터 이외에도 다양한 돌봄 서비스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들의 도입 취지가 저소득층 복지 향상이었기에 충분한 인력과 재원이 투입되지 못했고, 또한 방과 후부터 늦은 저녁까지 돌봄 서비스의 수요가 집중되다 보니 내국인 선생님들을 찾기도 어려웠다. 대다수 국민은 공공 돌봄 서비스 영역에서 기여하는 '필리핀 선생님'을 개별 가정에서 일하는 '필리핀 이모님'보다 환영할 것이다. 핵심은 돌봄 공유다. 다만 이는 서울시와 고용노동부뿐 아니라 교육부, 보건복지부, 기획재정부까지 참여하는 큰 틀에서의 협력과 조정이 요구된다.

[심승규 아오야마가쿠인대 국제정치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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