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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 (월)

한강 작가에게 수식어를 붙이길 거부한다 [1인칭 책읽기 : 노벨문학상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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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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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가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무엇 혹은 한국의 상징이 아니길 바란다.[사진=대산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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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하루 넘긴 10월 10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한국 문학계에 이 수상은 일종의 씻김굿이다. 씻김굿은 죽은 자가 이승에서 풀지 못했던 한을 풀어주는 무속의 제사다.

죽은 자의 한을 풀어준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 굿은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의 한을 풀어줄 때가 많다. 씻김굿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이미 떠나간 죽은 자가 다시 소환된다. 죽은 자를 기억하고 또 떠나보내는 굿을 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미처 다듬지 못했던 마음을 흘려보내며 안정과 안식을 느낀다. 일종의 종교적 심리치료다.

노벨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아카데미는 "한강 소설가의 작품은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이라고 평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5ㆍ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죽은 이를 현세現世에 소환한다. 그리고 죽은 이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것이 노벨문학상이 평한 '독특한 인식'이자 씻김굿 그 자체다. 하지만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을 씻김굿이라 말한 건 소설적 형식 때문만은 아니다.

문학 전문기자가 된 후 매해 10월 둘째주 목요일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를 기다리며 야근하는 날이었다. 새벽까지 남아 야식을 먹으며 동료 기자들과 사무실에서 수상 발표까지 대기하고는 했다. 같은 날 대형 방송사들은 경기도에 있는 고은 시인의 집을 직접 찾아갔다. 마치 종교의식 같았다. 고은 시인의 집을 찾고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면 매번 '소수자 언어의 아픔' 혹은 '한국문학의 위치'를 모두가 이야기했다.

한국에는 많은 작가가 있다. 좋은 작품은 작가보다 더 많다. 그럼에도 매번 고은 시인을 노벨문학상 후보처럼 여겼다. 그를 근현대사의 아픔, 민족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현대사를 관통한 5600명의 사람을 담은 「만인보」나 '문학인 101인 선언' 같은 민주주의 운동은 고은 시인을 민족시인으로 부른 이유였다.

우리가 지금 읽고 쓰는 한국의 현대 문학은 서구에서 이식됐다. 우리의 전통을 계승한 문학이 아니다. 그래서 여태 한국 문학계는 문학의 계보를 이야기할 때면 '창작과비평(창비)' '문학과지성사(문지)'를 언급하며 한국 문학이 미국식 문학에 가까운가 프랑스식 문학에 가까운가를 논하곤 했다. 미국이든 프랑스든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의 아버지'는 서구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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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고은인가. 민족의 것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은 서구 사회에서 가장 인정받는 문학상이다. 그렇기에 그 문학상을 한국이 받게 된다면 가장 '민족'적인 것으로 받아야 했다. 그냥 한국 문학이 아닌 우리 민족의 이야기로 인정받겠다는 욕구는 콤플렉스에 가까웠다. 이 왜곡된 욕구는 매해 10월이면 비 오는 날 아픈 무릎처럼 찾아왔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런 의미로 씻김굿이다. 이번 노벨문학상이 '아버지'의 권력(가부장제)을 비판한 한강 작가가 수상했다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다. 한국 문학계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절절맬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가 '민족'적인 것으로 인정받겠다는 욕구를 채우지 못했어도 노벨문학상은 우리 역사를 다룬 작가가 수상했다.

한강 작가는 좋은 작가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천재는 아니다. 우리 문단의 작가 중 한명이다. 그리고 그 소설을 한국 밖에 내놓기까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학번역원, 대산문화재단 등 국내 문학계의 다른 보편적 시스템이 함께 작동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런 한국 문학계의 보편적 시스템도 녹아 있다. 그렇기에 이번 성취는 특별한 작가의 등장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문학의 보편이 어디에 와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다.

나는 한강 작가의 이름 앞에 다른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무엇을 붙일 필요 없이 한강 작가의 수상 그 자체를 축하한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 키워드, 주제 의식은 아버지, 가부장제, 그리고 국가 단위로 이어지는 폭력을 말한다. 그렇기에 그가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혹은 민족이나 한국의 상징이 아니길 바란다. 한 그루의 소설가, 나무이길 바란다. 다시 한번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이민우 문학전문기자

문학플랫폼 뉴스페이퍼 대표

lmw@news-pap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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