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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일)

‘고백의 여왕’ 트레이시 에민의 침대···누워있는 것은, 암 투병 고통과 상실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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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침대’로 유명한 트레이시 에민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서 대규모 개인전

암수술 고통과 죽음의 공포 등

토해내듯 쏟아내는 그림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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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화아트큐브 버몬지에서 열리고 있는 트레이시 에민의 ‘I followed you to the end’ 전시 전경. 런던|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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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트레이시 에민(61)의 대표작 ‘나의 침대’(1998). 흐트러진 침대 시트 주변으로 버려진 휴지, 빈 술병, 콘돔과 피임약 등이 널부러져 있는 침실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저 너저분한 사생활을 보여주는 침대로 보일 수 있는 이 작품은 터너상 후보에 올랐으며, 크리스티 경매에서 220만 파운드(약 40억원)에 판매됐다.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을 폭로하듯 도발적으로 드러내는 에민은 ‘고백의 여왕’으로 불린다. 강간, 낙태 등 굴곡진 개인사를 그는 예술로 드러냈다. 자극적이란 논란에도 불구하고 에민이 성공한 작가로 인정받은 이유는 그의 작업이 젊은 여성의 삶의 취약성과 상처를 날 것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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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에민 ‘나의 침대(My bed)’, 1998. 위키피디아


예순이 넘은 에민은 여전히 ‘고백의 여왕’이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삶의 ‘날 것’의 모습이 바뀌었을 뿐이다.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 버몬지에서 열리고 있는 에민의 대규모 개인전 ‘나는 너를 끝까지 따라갔어(I followed you to the end)’엔 질병과 고통, 죽음과 공포, 사랑과 상실에 대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넘쳐흐른다. 지난 8일(현지시간) 방문한 화이트큐브 버몬지엔 웅크리고 뒤틀린 몸, 솟구치는 피, 죽음을 암시하는 그림들이 가득했다. 1650평(5440㎡) 규모의 대형 갤러리를 에민의 회화 40여점, 조각 2점과 영상이 꽉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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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화아트큐브 버몬지에서 열리고 있는 트레이시 에민의 ‘I followed you to the end’ 전시에서 대형 브론즈 조각이 한가운데 전시돼 있다. 런던|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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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묘 티컵과 함께한 트레이시 에민. ⓒHarry Weller 화이트큐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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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큐브의 알렉스 오닐 선임 디렉터는 “에민은 ‘나의 침대’ 등 설치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회화가 그의 작품의 기초를 이룬다”며 “암에 걸린 고통, 가족의 죽음, 사랑과 상실에 관한 그림들로 에민은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며 그것을 토해내는 것에 가까운 작품을 선보인다”고 말했다.

에민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인 2020년 방광암으로 큰 수술을 받았다. 살기 위해 몸의 많은 부분을 잘라내고 재구성해야 했다. 장과 방광, 요로, 자궁 등을 제거하고 복부에 구멍을 내 요관을 외부로 연결했다. 전시에선 에민이 직접 촬영한 영상 ‘피의 눈물(Tears of blood)’을 볼 수 있는데, 에민은 복부에 있는 피맺힌 장루(腸瘻)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에민은 장루에 주머니를 달고 생활한다.

그림엔 에민이 통과해온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복부의 구멍에서 피가 솟구치고, 물감이 눈물처럼 그림에서 흘러내린다. 진홍색 물에 머리를 담근 채 하반신에서 피를 흘리는 여성의 그림은 바로 옆에 나란히 걸린 “내 몸이 죽은 것 같아서 섹스하고 싶지 않아”라는 글씨를 쓴 작품과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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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화아트큐브 버몬지에서 열리고 있는 트레이시 에민의 ‘I followed you to the end’ 전시 전경. 화이트큐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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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ey Emin ‘I Kept Crying ’, 2024., Acrylic on canvas, 122.3 x 122.3 cm 화이트큐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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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공간인 침대는 이제 투병과 죽음을 의미하는 장소로 변했다. 그림 속 에민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지만, 연인과 함께 있어도 고통스럽고 서로 단절된 모습이거나, 홀로 죽어가는 모습이다. 몇몇 그림엔 에민의 반려묘인 티컵이 등장해 곁을 지킨다.

전시장 가운데엔 거대한 브론즈 조각이 설치돼 있다. 엎드린 하반신의 모습과도 비슷한 투박하고 거친 질감의 조각은 도발적이기보다는 취약해보인다. 들어내고 해체하고 재구성한 신체에 대한 감각을 표현한 듯하다.

갤러리를 가득 채운 고통과 피, 절규가 과잉된 듯도 하다. 하지만 이토록 날것으로 자신의 고통과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역시 에민이기에 할 수 있는 작업일 것이다. 에민이 지르는 고통에 찬 비명은 삶의 취약성과 함께 재생의 의지를 드러낸다.

에민은 2013년 대영제국 훈장(CBE)을 받으며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의 대열에 올랐다. 그는 암 수술 후 고향 마게이트로 돌아와 큰 스튜디오를 짓고 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예술가들이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지원하고 있다.

런던 |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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