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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토)

‘연애의 필수’ 데이트, 산업혁명 이후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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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교수가 쓴 데이트의 사회사

조선일보

사랑은 노동

모이라 와이글 지음|김현지 옮김|아르테|468쪽|3만8000원

현대사회에서 데이트는 연애의 필수 코스이자 결혼으로 가는 관문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산업혁명의 결과물이다. 하버드대 비교문학과 교수가 쓴 이 책의 부제는 ‘The Invention of Dating(데이트의 발명)’. 데이트라는 개념의 시원부터 온라인 데이팅 앱까지 데이트의 사회문화사를 다룬다.

‘데이트’라는 단어가 ‘날짜(date)’를 정해 남녀가 만난다는 뜻으로 신문 지면에 처음 등장한 건 1896년. 중산층 독자들에게 노동 계층의 생활상을 엿보게 해 주는 칼럼에서 등장했는데, 당시 데이트란 노동 계층의 문화였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구애는 ‘방문(calling)’이라는 방식으로 실내에서 이루어졌다. 여성이 16세쯤 되면 구혼자를 받을 자격이 생겼고, 어머니는 일주일 중 하루를 지정해 남성이 딸을 방문,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노동 계층에선 사정이 달랐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농촌 아가씨들은 부모의 감독 없이 자유롭게 남자들을 만났다.

데이트라는 개념이 막 생기기 시작할 무렵인 1880년대 미국에서, 남자가 여자를 어딘가로 데려가 뭔가를 사준다는 발상은 충격적이었다. 그전까지 남편 아닌 남성과 공적인 장소에서 식사하는 건 성매매 여성 외엔 없었기 때문에 데이트란 곧잘 성매매와 혼동됐다. 1900년대 초엔 미국 전역에서 풍기문란죄 단속위원회가 수사관을 파견해 사람들이 데이트하는 곳을 살피게 했다. 당시 데이트하는 여성들은 ‘자선 소녀(Charity Girls)’라 불렸는데, 성매매 여성과 이들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남성에게 현금을 받는가 여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성이 여성과 시간을 함께 보내며 식사를 대접하거나 선물을 주는 일이 저속한 게 아니라 낭만적인 행위로 자리 잡았다.

‘방문’은 명백히 결혼을 위한 것이었지만, 데이트가 뭘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았다. 그 남자는 날 좋아하는 걸까? 그 여자는 단지 날 이용하는 걸까? 궁금해한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데이트엔 종종 시장의 용어가 적용된다. ‘누군가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비싸게 굴어야 한다’, ‘상대방이 거저먹도록 내버려두면 스스로를 제값보다 못하게 팔아넘길 위험이 있다’…. 저자는 데이트란 ‘거래’의 영역에 있고, 따라서 경제학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데이트인(人) 다수가 여전히 희망하는 장기 계약직이 결혼이라면, 데이트 자체는 현시대 노동 가운데 최악의, 가장 위태로운(precarious) 노동 형태인 무급 인턴십 같다.”

현대사회의 연인 사이에서 취향의 공유는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지만, 이 역시 데이트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취향(taste)은 계급을 나누고, 계급 나누는 사람의 계급을 나눈다”고 말했다. 저자는 “계급 정보는 데이트 시장에서 여전히 유용하다”고 말한다. 1920년대 미국 대도시에서 백화점, 레스토랑이 발달하고 여성 판매원들이 활약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신분 상승을 꿈꾸며 상류층의 취향을 습득했다는 것이다. “취향의 규칙을 잘 이해하면 이를 조작해 자기보다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사람과 데이트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여성 데이트인들이 시도한 일이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젊은 노동 계층 여성은 백만장자와 말을 주고받기는커녕 그의 눈에 띄기도 불가능했지만, 시대가 바뀌며 데이트 신청을 받을 정도로 오랫동안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됐다. 이전엔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 여성이 백만장자의 아내나 딸처럼 하고 다닐 수 없었지만, 변화한 시대의 서비스업 여성들은 부유한 여성 고객의 취향을 연구해 자신의 패션으로 소화했다. 배우나 성매매 여성의 전유물이던 화장이 대중화된 것도 1920년대. 화장품 업계는 화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메이크업’이라는 새 용어를 만들어 냈다. “여성 판매원은 판매하는 상품류에 정통한 소비자가 돼야 했다. 남자들이 잘 가꾼 외모, 구매하는 상품류를 통해 보내오는 신호를 읽는 법을 터득했다.”

“사랑에 대한 담론에서 종종 누락되는 권력과 돈에 관한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우아하게 쓰였고, 재밌고, 읽기 쉽다.” 책을 읽다 보면 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이 평가에 동의하게 된다. 여성 억압의 궁극적 원인으로 계급 차별을 주목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쓰였지만 남성을 비방하거나 여성을 희생양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미국 사회의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우리 현실에 대입하기에도 크게 낯설지 않다. 낭만적 관계에서 ‘완전 고용’이라 할 수 있는 1:1 독점 데이트(going steady)가 혼전 성관계를 부추긴다며 부정적으로 여겨지다가 미국 경제가 호황이었던 1950년대에 데이트 비용을 감당할 만한 젊은이가 많아지면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원제 Labor of Love.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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