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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목)

“우리집 얘기 같다”...'베테랑2' 돌풍 속 관객 이어지는 웰메이드 영화 '장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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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장손' 2만7000관객 화제

대가족 3대 제사·장례에 근현대사 새겨

'차세대 거장' 주목받는 오정민 감독

"사라지는 세대 장례 치르듯 만들었죠"

중앙일보

영화 '장손'은 어느 제삿날, 가문과 가업의 존속을 두고 대가족 3대가 펼쳐내는 70년 세월의 비밀과 거짓말을 통해 우리 시대 가족의 의미와 문제를 되묻는다. 사진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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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따뜻한 가족 영화, 또 누군가는 아리 애스터 감독 작품처럼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오는 공포영화라더군요.”(오정민)

대구 시골마을에서 두부공장을 하는 가부장적 김씨 집안 3대의 70년 가족사가 관객마다 다른 해석을 불렀다. 올추석 흥행 1위 ‘베테랑2’와 나란히 좌석판매율 30%를 넘긴 유일한 한국영화 ‘장손’(9월 11일 개봉)이다. 성균관대 국문과를 거쳐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연출전공을 한 자칭 ‘이청준 키드’ 오정민(35) 감독이 각본을 겸한 장편 데뷔작이다.



추석 흥행 역주행…"우리집 얘기 같다" 관객 줄이어



신인 데뷔작인 탓에 전국 최다 상영관수가 60여개에 불과했지만, “우리 집 얘기 같다”며 찾는 관객이 잇따랐다. 대가족 제삿날, 가업 존폐를 둘러싼 세대갈등부터 할머니(손숙) 장례식 후 사라진 통장, 재산 분쟁 등 적나라한 소재가 명절 시즌과 맞물려 지난 16일 관객 2만7000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KBS독립영화상‧CGK촬영상‧오로라미디어상 3관왕), 올해 호주 시드니‧멜버른국제영화제 등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임권택 감독의 ‘축제’(1996),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1996), 대만 감독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2000) 등 가족사에 근현대사 아픔을 새겨낸 아시아 거장들의 걸작에 비견됐다. 7분 남짓한 롱테이크 엔딩신을 비롯해 공들여 고증한 전통제례 풍경, 3계절(여름~겨울)에 걸친 농촌 마을의 한옥 풍광을 담은 롱숏(원거리 촬영) 등 최근 한국영화에서 드문 미학을 보여줘 ‘차세대 거장’ 수식어도 나온다.

“사라지는 윗세대에 대한 장례 치르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오 감독을 지난달 서울 종로 신문로 카페에서 만났다. 고등학교 시절 이청준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창작에 눈뜬 그에겐 “‘장손’에서 이청준 소설 『눈길』이 떠오른다는 관람평이 가장 뜻깊었다”고.



"왜 하필 대구? 자기 것 지키는 TK 정서 잘 맞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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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의 대구 김씨 3대 대가족 제사 모습. 성진(강승호, 맨오른쪽)의 할아버지 승필(우상전, 가운데)을 중심으로 아버지 태근(오만석), 성진까지 집안 장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오정민 감독은 '장손'에서 "사라지는 것들의 뒷모습과 롱숏을 잘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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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 태어나 자란 고향 동네 이름(대명동)을 자신의 영화사 이름에 붙인 그는 첫 장편도 자신의 가족에서 출발했다. “20살 때 친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모르고 있던 가족들의 갈등이 시작됐죠. 가족 안에 대한민국의 역사를 담아,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극 중 10명 대가족이 사는 큰 한옥은 경남 합천에서 구했다. 실제 80대 부부가 집안 제사를 모시며 사는 집이었다. 극 중 무대는 대구를 고수했다. “내 정체성이 대구 사람이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주제가 자기 것을 꼬장꼬장 지키는 TK(대구·경북) 지역 정서와 잘 맞았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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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손'에서 김씨 가족의 두부공장은 수증기 자욱한 내부가 아득하고도 갑갑해 보인다. 온가족을 먹여 살린 세상의 전부처럼 여겨지지만, 정작 밖에서 본 공장 건물은 작고도 단출하다. 영화 속 가부장적 3대 집안의 은유 같다. 사진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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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한국전쟁 생존자인 할아버지 승필(우상전)이 혈혈단신 온가족을 먹여 살린 가업을 두부공장으로 정한 건 “갓 만들면 고소하고 맛있지만 쉽게 변질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 영화일을 하는 장손 성진(강승호)은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성진의 아버지 태근(오만석)은 현대식 공정 도입 문제를 놓고 전통을 고집하는 승필과 갈등을 벌여왔다.

“두부는 원재료 콩이 만주‧한반도 일대에 주로 나는 아시아적 음식이고, 고된 과정 끝에 소량의 두부를 만들고 남은 재료는 다 버린다는 게 유교 가부장제 속성과 비슷하다”고도 오 감독은 덧붙였다.



"가족은 정답 없는 미스터리…갈등의 시대 완충제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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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손'이 "아카이빙 하듯"(오정민) 담아낸 전통 장례 풍경. 다양한 세대, 성별의 베테랑 배우들도 전통적 가족사에 대한 기록에 큰 역할을 했다. 최고령 손숙부터 막내 강승호까지 대부분 경상도 출신으로, 캐스팅만 2년 걸렸다. 모든 배우가 6개월간 이 영화만 전념하며 진짜 가족 앙상블을 빚어냈다. 사진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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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세대‧성별‧계급을 다 담아보려 설정한 극 중 대가족 모두가 주인공이지만, 영화는 누구의 진심도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오 감독은 “여전히 내게 가족은 미스터리한 존재로 정답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또 이 모든 혼란의 시초인 ‘1세대(할아버지대)’에 대한 애증도 드러냈다. 그는 “왕이 있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한국전쟁을 겪고 독재‧민주화, 지금의 신자유주의까지 휩쓸려온 이 세대는 어떻게 제정신으로 버텨올 수 있었을까, 연민이 컸다”면서 “영화를 보며 관객이 각자 가족을 떠올릴 수 있기를, 극심한 세대‧남녀 갈등의 시대, 이 영화가 완충제가 되길 바랐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온 마을을 멀찍이 굽어보는 ‘장손’의 장면들은 마치 100년 넘게 마을을 지켜온 아름드리 고목의 시선 같기도 하다. “사라지는 것들의 뒷모습과 롱숏을 잘 찍고 싶었다. 세트 촬영, 배우 얼굴 클로즈업에 치중한 한국영화가 많은데, ‘장손’은 관객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고 과거 우리가 영화에 매혹된 이유를 회복하고자 했다”고 오 감독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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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손'에선 장례식 후 사라진 통장뿐 아니라 고모집(차미경)의 갑작스런 화재 등 미스터리한 사건이 잇따른다. 한꺼풀 들춰보면 70년 묵은 가족의 비밀이 도사리고 있다. 사진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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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을 만들며 거장 감독의 고전도 참고했다. 허우샤오시엔의 ‘동년왕사’(1985),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오즈 야스지로의 ‘꽁치의 맛’(1962), 루키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1963), 임권택 영화들이다.



독립·예술영화 20여편 개봉 몰린 이유? 영진위 개봉지원 실책



호평에도 불구하고 ‘장손’은 상영관이 전국 20개 대로 줄었다. 올해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예술영화 개봉지원 실책으로 가뜩이나 상영관을 잡기 힘든 독립‧예술영화들이 올가을 개봉이 몰리게 된 탓도 크다. 올 11월까지 개봉해야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인데, 2월에 출품작을 신청받아 심사결과를 6월 중순에야 발표했다. 선정작 20여편이 그때서야 부랴부랴 극장 확보에 나섰다.

영진위 측은 내년부터 시정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올해 선정작들의 개봉 형편이 각박해졌다. ‘장손’은 비슷한 시기 웰메이드로 화제가 된 독립영화 ‘그녀에게’ ‘딸에 대하여’ ‘해야 할 일’과 함께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장기 상영 캠페인에 돌입했다. 오 감독은 “어떻게 시장을 개선해야 할지 함께 목소리를 내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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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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