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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목)

[신복룡의 신 영웅전] 쇼팽의 무덤이 두 곳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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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1830년 11월 2일 폴란드 바르샤바역에서 한 소년이 기차에 올랐다. 이름은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사진)이었다. 그 무렵 이미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의 명성을 얻어 연주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그에게 고향에서 작은 소포가 배달됐다. 한 줌의 흙이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조국 폴란드의 흙’이라 적혀 있었다.

쇼팽은 빈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프랑스 여류 소설가이자 사교계의 별인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만나 모정과 애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객지 생활의 고독과 우울에다 건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쇼팽은 폐결핵으로 쿨룩거리고 있었다. 연상의 상드는 어머니처럼, 아내처럼, 간호사처럼 쇼팽을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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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행복한 세월은 9년이 지나 끝났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영국 런던에 도착한 쇼팽은 스코틀랜드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해는 유난히도 추웠다. 찬바람과 눅눅한 기후는 폐결핵을 앓던 쇼팽에게 극약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 1849년 10월 17일 끝내 눈을 감았다. 39세였다. 임종 무렵 머리맡에는 19년 동안 들고 다닌 조국의 흙이 있었다. 마들렌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쇼팽이 존경했던 모차르트의 진혼곡(Requiem)이 울려 퍼졌다. 유해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됐다. 쇼팽의 친구가 관 위에 한 줌의 폴란드 흙을 뿌려줬다.

며칠이 지나 바르샤바의 한 교회에서 쇼팽의 또 다른 장례식이 거행됐다. 관도 없이 자그마한 상자 하나만 매장됐다. 그 안에 쇼팽의 심장이 들어 있었다. 친지들은 쇼팽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심장만이라도 고국에 묻어줬다. 오늘이 쇼팽의 175주기다. 이런저런 행사가 이어지겠지만, 음악을 모르는 나에게는 그가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누가 말했던가. 예술에는 조국이 없다고….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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