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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화)

32년 만에 꺼내본 과선배 한강의 시 [필동정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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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작가 한강.[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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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봄 전공수업 ‘시 창작론’ 시간이었다. 교수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짧은 시 ‘섬’을 쓴 시인 정현종이었다. 학생들이 과제로 제출한 시 가운데 정 교수가 뽑은 작품은 딱 2개. 그중 하나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당시 4학년 한강의 시였다. 정 교수는 복사본을 나눠준 후 인상 비평을 하게 했던 것 같다. 3학년이었던 나를 포함해 많은 학생들이 그 시의 유려한 문장과 리듬감에 압도되고 도취됐던 기억이 난다.

혹시나 그 시를 아직 소장하고 있을까 해서 집을 뒤져보았다. 이사할 때마다 몇 번을 버리려다가 도로 싸놓은 때 묻은 상자에서 시를 발견했다. 자필은 아니고, 타자기의 진화 버전인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글이었다. 제목은 ‘2월’. 어머니에 대한 시다. 이렇게 시작한다.

“나의 어머니, 쉰두 살, 윗입술이 잘 부르트시고, 반세기를 건너오시면서도 웃을 때면 음조나 표정이 소녀 같은, 아니 소년 같은 분. 고즈넉한 저녁 딸과 마주 앉아 마늘을 까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피리 소리, 바람 찬 창으로 두리번거리던 딸은 소리의 주인공을 발견 못 한다. 이렇게 또 봄이 온다는 건가. 딸은 믿을 수가 없다. 구성진 가락은 다뉴브강의 푸른 물결, 윤심덕이 부른 노래.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총 8연으로 된 긴 시다. 뒷부분에선 어머니를 “그렇게 다치시고도, 벌집이 되시고도 상처로 진물 흐르지 않는 분”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한강은 ‘연세 시학’이라는 학과 내 소모임에서도 활동했고, ‘편지’라는 시로 학보사가 주최하는 ‘윤동주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문단 데뷔도 시로 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한강의 소설을 평했는데, 시적 언어는 이런 이력들과 무관치 않다. 그는 말수가 적고 조용조용했지만, 시를 쓸 때나 신명 나게 북과 장구를 칠 때면 용암처럼 뜨겁게 불타는 내면을 슬쩍 드러냈다.

쓰고 보니 요즘 유행하는 ‘한강 숟가락 얹기’가 됐다. 하지만 문학이 죽어가고,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에 찾아온 ‘축복’이 오래가길, 사라진 ‘읽기 문화’가 부활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의 추억팔이다. 사람들이 다시 책을 잡기 시작했다. ‘한강 이펙트’가 계속되길 기대한다.

다음은 한강의 시 ‘2월’이다. 대학생 시절 한강의 시적 감성을 엿보는 시간을 독자들과 함께 하길 바라며 소개한다.

2월

나의 어머니, 쉰 두살, 윗입술이 잘 부르트시고, 반세기를 건너오시면서

도 웃을 때면 음조나 표정이 소녀같은, 아니 소년같은 분

고즈넉한 저녁 딸과 마주앉아 마늘을 까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피리

소리, 바람 찬 창으로 두리번거리던 딸은 소리의 주인공을 발견 못 한다. 이

렇게 또 봄이 온다는 건가. 딸은 믿을 수가 없다. 구성진 가락은 다뉴브강의

푸른 물결, 윤심덕이 부른 노래.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

좋은 날은 다 지나가버린 것 같아요 엄마

어머니 조용히 웃으신다

너도 지금 좋을 적 아니냐

이젠 저도 책임져야 될 나이가 된 걸요, 곧 졸업이에요

어머니 일어나 가스렌지 불을 줄이신다

느그 외할무니 하시던 말씀이 다 맞어야···비 피할라고 잠깐 굴에 들어갔

다 나온 것맨이로 그렇게 청춘이 가버린다고···

­

그렇게 청춘이 갔어요 어머니, 늪같은 청춘이 며칠 밤 목울음으로 다 새어

나가버렸어요

­

엄마 청춘도 그랬어요?

웃으며 딸이 짐짓 묻는다

글쎄,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야

어머니 조용히 밥을 푸신다

하나도 기억이 안나···

­

어머니, 무엇이 아픈 어머니의 머리를 떠돌고 있을지, 혼령같은, 무슨 통

곡같은

­

나는 다시 태어나믄 사람으로 안 태어나고 싶어야, 꽃이나아, 나무나아,

새나, 난 그런 것으로 태어나고 싶어야

­

엄마, 새는 고달퍼요 벌레도 잡아먹어야 하고 허공을 종일 날아야 하잖아

요 산탄총을 피해야하고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야 해요

뭣은 그렇게 안 힘들다냐.

어머니 다시 조용히 웃으신다

엄마, 이왕이면 나무가 좋아요. 꽃은 금세 시들잖아요 흙 좋고 깊은 땅에,

아무도 베어가지 못할 곳에요·· 기껏 나무로 태어났는데 그리로 길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국도가 나지않을 한것진 들에 큰 나무로요···

어머니 웃으시네 소녀처럼, 아니 소년처럼 어머니, 우리 어머니 소리내어

웃으시네

정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라믄, 베어지면 또 딴걸로 태어날 거 아

니냐

····뭐가 걱정이냐

­

나의 어머니, 쉰 두살, 그렇게 다치시고도, 벌집이 되시고도 상처로 진물

흐르지 않는 분, 눈물만, 고즈넉히 맑은 물만 흐르는 분, 반세기의 毒 묻은

사랑, 슬픔으로만 오로지 슬픔으로만 번지는 분

­

냇가에 나갔더니 어머니, 온통 얼음인데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요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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