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왜 전쟁을 막지 못했나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제 세 번째 겨울을 마주하고 있다. 전쟁 3년 차에 들어선 지 반년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종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전쟁의 출구를 찾는 동시에 전쟁으로 빠져 들어가던 시기에 대한 복기도 이뤄지고 있다. 왜 유럽은 이 전쟁을 막지 못했는가?
‘눈먼 자들’. 프랑스와 독일은 러시아의 의도와 팽창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칼럼리스트 실비 카우프만이 출간한 책 『눈먼 자들(Les Aveugles)』(사진)은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길을 열어주게 됐다고 주장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의 과정을 복기한다. 진단은 냉엄하다. 대화와 경제적 상호의존이 평화를 담보해 준다는 원칙은 작동하지 않았다. 경고는 종종 무시됐다. 최악의 상황은 그럴 때마다 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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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독일의 오판이 러시아의 침공 길 열어줬다는 비판 제기
선의에 기반한 외교, 권위주의 국가와의 관계에선 지속 어려워
대화와 교류가 평화 담보 못해, 냉철한 생존 본능이 외교의 근간
불확실한 국제 질서의 시대…동맹의 신뢰도를 높여서 대응해야
“러시아에 굴욕감 주지 않는다”
우크라이나군 특수부대인 아조우 여단 군인들이 지난 4일 우크라이나 북부 체르니히브 지역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사망한 동료를 추모하는 불꽃을 들어올리고 있다. 유럽에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프랑스와 독일의 오판이 러시아의 침공 길을 열어줬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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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유럽의 지정학은 이미 냉전 구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러시아에 대한 일련의 제재 조치들이 실시됐다. 하지만 대화를 중심으로 한 관계 설정은 이어졌다. 유럽 대륙에서 실질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이 이러한 시도에 적극적이었다. 반면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과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팽창 의도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음을 울렸다.
모든 프랑스 대통령들은 새로운 유럽의 안보 구도를 만들고 싶어했다. 거대한 구상을 중시하던 프랑스의 특성이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와의 긴밀한 관계 설정은 역사적으로 유럽의 숙원이었다. “러시아에 굴욕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프랑스의 외교적 전통이기도 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칼럼리스트 실비 카우프만의 책 『눈먼 자들(Les Aveugles)의 표지 |
2017년 임기 초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베르사유 궁전에 초청했다. 유럽 외교의 핵심임을 부각하는 젊고 패기 넘치는 신임 대통령은 러시아를 유럽에 묶어둘 수 있다고 믿었고, 유럽과 러시아 간의 안보와 신뢰에 기반을 둔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싶어했다.
2019년 8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마크롱 대통령은 남프랑스의 아름다운 코트다쥐르에 위치한 브레강송 요새에 푸틴 대통령을 다시 초청했다. 뒤이어 같은 해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소위 ‘노르망디 방식’으로 불리는 프랑스·독일·러시아·우크라이나 사이의 2+2 정상회담이 열렸다. 러시아의 선의를 확인해보고자 했던 시도는 푸틴과 신임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사이의 간극을 확인하며 다음 회동을 기약했다.
이 과정을 동유럽 국가들은 의구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유럽연합(EU)을 이끄는 프랑스·독일 두 나라의 안보 이익이 자국의 이익과 부합될 것인지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러시아는 이미 내부적으로 억압적이고 팽창적이고 현상 타파적인 추세가 역력했다.
대화와 경제에 대한 믿음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독일의 메르켈 전 총리가 2018년 5월 18일 러시아 소치에서 회동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
독일은 대화와 경제적 연계로 충분히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경제적 상호의존은 정치적 상호의존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무역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Handel)’는 독일 외교의 전통이자 동방정책의 근간이기도 했다.
크림반도 합병 이후 위축되기는 했지만 독일과 러시아의 경제·기술 연계는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2011년 완공된 노드스트림1 가스 파이프라인은 러시아와 독일의 에너지 교역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켰고, 뒤이어 건설된 노드스트림2 파이프라인도 개통을 앞두고 있었다. 이는 메르켈 총리의 역점 사업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유럽 시장과 긴밀히 연계돼 있었다. 동유럽에 대한 깊은 이해와 네 차례의 총리 재임 동안 푸틴 대통령과 맺어진 개인적인 네트워크 역시 메르켈에게 대화에 대한 확신을 더해줬다. 2021년 6월 영국 카비스베이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메르켈은 “냉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와의 관계는 지속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2021년 6월 24~25일 유럽정상회의에서 푸틴과의 정상회의를 제안할 계획을 세웠다. 임기를 마치며 마지막 유럽정상회의가 될 메르켈 총리가 먼저 제안했다. “러시아는 우리를 적으로 보고 있다. 나는 환상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푸틴 대통령과 얘기해야 한다. 우리는 위협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대화 기제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어나갔다. “직접적 당사자인 우리는 미국·러시아의 대화를 수동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동유럽 국가들의 경고 현실화
신임 EU 외교·안보 고위 대표 및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인 카야 칼라스 전 에스토니아 총리.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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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제안은 다른 회원국들과 사전에 조율되지 않았었다. 의외의 제동이 걸렸다. 발트해의 소국 에스토니아의 신임 여성 총리 카야 칼라스는 무엇에 대한 정상회의인지, 무슨 목표인지 되물었다. “우리는 푸틴이 크림반도를 포기할 때까지 정상회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늘 얘기했고, 아직 그 조건은 충족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 우리의 말은 가치가 없다는 걸 스스로 내보이게 될 것이다.”
결국 EU와 푸틴과의 정상회의 제안은 부결됐다. 대범하게도 독일 총리와 맞붙게 됐던 칼라스 총리는 오는 12월 신임 EU 외교·안보 고위 대표 및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지명됐다.
EU와 푸틴과의 정상회의가 성사됐다면 과연 전쟁을 막을 수 있었을까? 낙관적인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이 기존에 가져왔던 대화와 경제 교류를 통한 평화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렸다. 동유럽 국가들의 지속된 경고는 사실이 됐다. 러시아를 포함한 새로운 유럽 안보 체제의 원대한 그림도 사라졌다. 푸틴의 세계관과 의도를 오판하고 러시아의 선의를 기대했던 유럽 외교의 주역들은 강경 대응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북한·러시아·중국의 의도는
왼쪽부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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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와 이념이 다른 상대국을 대한다는 점에 있어서 유럽과 동북아의 상황은 서로 다르지 않다. 오히려 러시아라는 단일 주체를 대하는 유럽에 비해 동북아에는 북한·러시아·중국 등 다수의 현상 변경국들이 존재한다.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위협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미국·일본과 세계관을 달리하는 권위주의 국가들이다.
최근 감소 추세를 보이지만 한국·미국·일본 모두 중국과는 높은 수준의 경제적 연계를 가져왔다. 긴장 완화와 경제 관계 유지를 위한 중국·러시아 및 북한과의 대화 채널 복원도 여러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다.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외교는 대화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대화만 가지고 평화를 보장하기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너무나도 험난하다. 경제적 상호의존 역시 평화를 전적으로 담보해 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북한과 러시아와 중국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는가?
프랑스의 원로 외교관인 모리스 구도-몽타뉴는 저서 『남들은 우리처럼 생각하지 않는다』에서 민족중심주의의 시각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지적한다. 자신의 가치와 정치 체제가 일반적이라는 믿음은 상대방이 실제 가지고 있는 의도와 세계관을 보지 못하게 한다. 상대방은 내가 기대하는 대로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외교에서 필수적이다. 의도를 알아야 답을 찾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는 과정을 복기해 보는 유럽 지성인들의 시각은 한국이 당면한 상황에 시사점을 준다. 믿음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권위주의적 국가의 선의에 기반을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불확실성의 국제 질서에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자국의 안보, 경제적 역량과 동맹의 견고함이다. 하지만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행동과 성과가 받쳐줘야 동맹의 신뢰로 이어진다. 냉철한 생존 본능이 요구된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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