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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기고] 한국문학 가뭄 끝 단비 … 한강 소설은 찢긴 역사 고스란히 불러내는 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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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신드롬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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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끝에 단비"라는 우리 속담이 이렇게 맞춤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도 곱으로 그렇다. 10일 저녁 스웨덴으로부터 날아온 소식은 혼탁한 정치판과 사고뭉치 SNS로 인해 더럽혀진 눈과 귀를 단김에 씻어주었다. 이 비는 청정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문학의 오랜 갈증을 마침내 해갈한 상쾌한 소나기였다.

노벨 문학상이 문학의 최종 가치를 보장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건 문학 그 자체에 있지, 문학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오늘 확실히 새길 것은 한국문학이 오래도록 기다려온 이 낭보를 품에 안은 한강의 문학이 한국문학의 고유한 미학으로부터 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학은 흥미롭게도 '기다림의 미학'이다.

한강의 첫 책은 '여수의 사랑'이다. 그 표제작은 여수에 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왜 가는가? 고향 여수가 울고 있기 때문이다. 여수(麗水)는 여수(旅愁)이자 여수(女囚)이다. 고향은 객지의 시름이고 외지에 갇힌 몸이다. 그래서 고향이 자꾸 운다. 그러나 갇힌 몸이 어떻게 갈 것인가? 한강 문학의 전개는 온통 그 대답을 위한 탐구의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 준 '채식주의자'는 식물이 되고 싶어하는 여인의 이야기이다. 한곳에 머무는 식물성이야말로 기다림의 표상이다. 그것을 동물적 탐미주의가 탐욕스럽게 파괴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훼손은 지속된다. 광주 민중항쟁 중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상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만 흩어진 존재들은 저마다 귀환의 방식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작가의 문체이다. 체험과 사색이, 또한 과거를 묻으려는 태도와 옛 사건을 현재로 끌어오려는 의지가, 두 시제(時制)의 대위법적 대립으로 끈질기게 다툰다.

제주도 '4·3 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공문서 속에 사장된 역사의 현장을 찾아간다. "어디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동박새들이 신호를 주고받듯이 울었"던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것들이 모두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는 말이다. 소설의 언어는 이 간헐적인 신호들을 끊임없이 회화적 이미지로 치환하면서 독자의 눈에 선명히 각인시킨다. 이 역시 진실의 기다림과 그것을 찾아가는 귀환의 도정이다.

그리고 귀환 자체가 기다림이 된다. 돌아가는 여정이 험난한 장애물들로 가로막히는 것이다. 저 옛날 '황조가'로부터 시작된 기다림의 미학은 현대에 들어 김영랑이 바탕을 만들고 서정주, 김종삼, 정현종으로 이어졌다. 소설 쪽에서는 조명희, 황순원, 최인훈, 이청준 등의 작품들로 전개되었다. 이어질 때마다 미학의 쇄신이 일어났다. 기다림의 형식이 바뀌어야만 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다'는 '갔다' '와야 한다' '와야겠다'로 계속 바뀌었다. '떠났다'에서 '돌아가야 한다' '겪어야 한다' '기다리다 오다'로 변형되었다.

한강의 기다림을 어떤 버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상처 입은 역사가 고스란히 온다'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훼손된 것, 파묻힌 진실, 다친 사람들, 죽은 줄 알았던 생명들이 찢어지고 조각난 모습 그대로 꾸준히 방문한다. 기다리는 것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들은 소문과 공문서와 억측과 오해들로 덕지덕지 덮여 있다. 작가가 '흰' 이미지를 거듭 빚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강 기다림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기다림의 미학과 정화의 미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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