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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이슈 미얀마 민주화 시위

하루 도장 서른 개만 찍는 미얀마 대사관... '토픽6급' 인재도 한국을 못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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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얀마 한국대사관 업무 정체 실태]
현지 대사관, 공증은 온라인으로만 예약
태국·라오스 등 인접국 상시업무와 달라
지난해 공증 1만건, 담당자는 한두 명뿐
한국일보

주미얀마 대한민국 대사관 전경. 페이스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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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 사는 아웅(가명·23)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지만 패션 디자이너로 진로를 바꿨다. 계기가 있었단다. 한국 대중음악(K-POP)과 드라마(K드라마)에 푹 빠지면서부터다. 한국 문화에 심취한 그는 '꿈의 땅' 한국을 밟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듣기·말하기를 익힌 뒤, 글쓰기 실력을 키우기 위해 한국 신문을 읽어가며 공부했다.

아웅의 한국 대사관 수난사


그 결과 한국어능력시험(TOPIK)에서 가장 높은 등급(6급)을 따냈다. TOPIK 6급은 △전문 연구나 업무 수행에 필요한 언어 기능을 비교적 정확하고 유창하게 수행하며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친숙하지 않은 주제도 이해할 수 있는 단계를 가리킨다. 그야말로 한국에 바로 와서 고등교육을 받거나 회사를 다니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 피나는 한국어 연습을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웅의 계획은 번번이 틀어졌다. 한국 유학을 가려면 주미얀마 한국 대사관에서 '학적 서류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아서다. 인터넷 예약은 열렸다 하면 10분 만에 마감되기 일쑤고, 처리 건수도 제한이 있다. 올해만 벌써 다섯 번 실패한 아웅은 7일 한국일보와 화상으로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꿈을 거의 접은 상태"라며 고개를 떨궜다.

한국 유학 지망생들의 수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한국 대사관 탓에, 미얀마의 '친한파' 학생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 현지에선 한국 대사관 공증 업무를 대신 해 주겠다면서 착수금을 받고 잠적하는 신종 사기까지 횡행할 정도다. 그럼에도 당국은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해명을 내놓으며 개선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차라리 줄을 서게 해 주세요"

한국일보

주미얀마 한국 대사관의 6월 학적서류 영사확인 예약이 가득 차 있는 모습. 아웅은 예약이 시작되고 10분이면 모두 마감된다고 했다. 아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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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재외동포청과 외교부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이용선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주미얀마 대사관은 지난해 7월부터 '영사 민원 시스템'을 통해 학적서류 영사확인을 진행하고 있다. 공증변호사를 통해 현지어로 작성된 졸업증명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뒤, 주재국 외교부로부터 인증을 받고, 마지막으로 대사관이 한 번 더 영사 확인을 찍어주는 절차다.

문제는 대사관 직인을 받는 게 '하늘의 별 따기'란 점. 주미얀마 대사관은 △한 달에 한두 번 온라인으로만 업무 예약을 받고 △하루 30건씩만 처리한다. 이렇게 제한적으로 업무를 하는 건 미얀마 대사관이 거의 유일하다. 인접국인 태국과 라오스의 한국 대사관은 현장 접수를 받고, 베트남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상시로 서류를 받고 있다. 아웅은 "신청자가 몰려 사이트에 오류가 없는 날이 없다"면서 "차라리 몇 년 전처럼 현장 예약이 가능하다면 대사관 앞에 하루종일 줄을 서더라도 행복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하도 절차가 빡빡하다보니 절박한 유학생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사례도 줄을 잇는다. 한국 유학 준비생을 대상으로 대사관 공증 업무를 대리하는 업체가 등장했고, 간절함을 악용한 사기 사례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한국일보

한 미얀마 학생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 공유한 한국 대사관 공증대리 업무 사기 피해 사례. 아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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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료를 미얀마 현지 화폐가 아닌 달러화로만 받는 것도 또 다른 문턱이다. 재외동포청에 따르면 재외공관 중 미국 소재인 곳을 제외하고 수수료를 미화로만 받는 공관은 △주다낭 총영사관 △주베트남 대사관 △주미얀마 대사관 세 곳뿐이다. 정치 상황이 불안해 달러 암시장까지 형성된 미얀마에서 달러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 아웅은 "정말 어렵게 달러를 구해도 돈에 볼펜 자국이나 접힌 자국이 보이면 받아주질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사관에 갈 때마다 미얀마 학생들은 스스로 가치가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서 "우리는 한국에 가기 전부터 (고압적인) 한국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왜 미얀마 문턱만 높을까


왜 미얀마만 유독 이럴까. 2021년 군부 쿠데타로 정세가 불안정해진 후 대사관 업무가 폭증한 게 배경이다. 미얀마 군부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후 대사관의 공증 업무가 크게 늘었다. 주미얀마 대사관에 따르면 공증 건수는 사태 직전 해인 2020년 4,216건에서 지난해 1만1,340건으로 대략 세 배 가까이 뛰었다.

방문 예약제로 운영하기엔 지나치게 많다보니 예약 접수 방식을 온라인으로 돌렸지만, 담당 인력은 2명도 안 돼 처리 속도는 하세월이다. 재외동포청 관계자는 "주미얀마 대사관은 인력 대비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면서 "동남아 위성통신망을 쓰고 있어 시스템도 원할하지 못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지 여건이 녹록지 않다 해도 상황을 이대로 방치하는 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소영 재한외국인및유학생지원센터 센터장은 "국내에 일하러 온 미얀마인들이 '동생을 한국에서 공부하게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냐'는 문의를 많이 한다"면서 "(대사관 측은) 일이 많고 인력은 부족하다지만 현지인 채용을 더해서라도 해결할 수 있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최현빈 기자 gonnal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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