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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금)

'전생에 나라 구한' 고려아연 주주는 괴롭다 [뉴스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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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일가가 출자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 제리코파트너스가 이사회를 열어 고려아연 의결권 1.85%를 소유하고 있는 영풍정밀의 주식 공개매수 가격을 결정하는 7일 서울 종로구 고려아연 본사가 입주한 사무 건물에 사명이 적혀 있다.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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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오르면 기분 좋죠. 그런데 양측이 전쟁하는 걸 보면 씁쓸합니다. 주주들 위해서 저러는 게 아니잖아요. 회사 앞날을 생각하면 마음은 무겁습니다. 누가 이기든 후유증이 클 것 같으니까요."

3년차 고려아연 주주인 40대 직장인 A씨는 고려아연과 MBK파트너스·영풍이 벌이는 경영권 분쟁에 마음이 복잡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부러워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냐"고들 하지만 갈수록 불안하다고 했다.

추석 연휴 직전 영풍이 토종 사모펀드 1위 MBK와 손잡고 고려아연 주식을 공개적으로 사들이겠다는 발표를 했을 때만 해도 흐뭇했다고 한다. 주식 시장에서 관심을 받지 못했던 고려아연이 그 가치를 인정받는구나 싶어서였다. 장씨·최씨 두 집안이 75년 동안 동업했으니 이별할 때도 됐다고 '정신 승리'도 했다.

고려아연은 아연, 연, 금, 은, 인듐 등 비철금속 십여 가지를 해마다 120만 톤 생산하며 글로벌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비철금속을 순도를 높여 추출하는 기술은 세계 최정상급이다. 제조업 회사를 다니는 A씨는 고려아연이 잘돼야 대한민국 경제가 튼튼해진다는 생각에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주식을 사 모았다.

처음 양측이 공개매수 가격을 경쟁적으로 올리고 주가가 껑충껑충 뛰었을 때 A씨는 짜릿했다. 한 달 만에 주가가 40% 가까이 상승했으니 주식 투자자로서 실력을 입증한 것 같아 뿌듯했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나. 양측이 사생결단하듯 경쟁하면서 고려아연이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최윤범 회장의 고려아연은 2조5,000억 원, 김병주 회장의 MBK 측은 1조9,000억 원을 빌렸다. 그 이자만 고려아연은 1,300억 원, MBK는 900억 원(만기 기준)이니 부채비율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최 회장 측이 자기자금이라고 밝힌 1조5,000억 원 중 1조 원은 빌린 돈이었다고 뒤늦게 정정하면서 현 경영진에 대한 신뢰도는 떨어지고 이겨도 진 것이나 다름없는 '승자의 저주' 가능성이 더 커졌다. 금융감독원이 불공정 거래가 있었는지 조사에 나선다는 뉴스까지 들린다.

회사의 핵심 경쟁력이 약해질까 싶어 속앓이도 한다. 경영권 다툼 이후 수천억 원대 니켈 공급 계약이 어긋나고 이차전지 납품 계약도 지장을 받을지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일부 주주들은 사모펀드의 특성을 감안하면 MBK가 고려아연 대주주가 된 뒤 값을 올려 되팔 것이라며 특히 그 대상이 중국 자본이면 큰일이라고들 한다. MBK는 중국에 팔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A씨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쩐의 전쟁' 중에 주주를 위한 고민의 흔적은 없다는 점이다. 최근 한미약품(모녀와 형제의 다툼), 한국앤컴퍼니(형제간 갈등) 등 창업주 2, 3세들이 적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쥐고 멋대로 기업을 운영하다 사모펀드 등 외부 세력의 경영권 확보 시도에 쉽게 노출됐던 이유 중 하나도 주주의 권리 보장 소홀이다. 고려아연 사태로 경영진은 주주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고 주주 마음을 얻는 경영을 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위기 때 제 아무리 허리를 숙인다 해도 지지 받기 힘들고 경영권은 빼앗긴다. 주가만 올려주면 끝이라는 생각은 주주들로부터 외면 받기 십상이다.

박상준 산업부장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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