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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이진우칼럼] 가계부채 탕감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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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대부분의 분야가 정체, 둔화, 퇴보하는 한국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게 있으니 바로 가계부채다.

외국 전문가들에게 한국 경제 최대 리스크를 물으면 십중팔구 가계부채를 꼽는다. 대략 2010년부터 디레버리징(부채 축소) 추세를 보여주는 미국, 유럽과 달리 한국은 우상향 곡선이 확연하다.

이제 가계부채는 관리가 아니라 '칼질'이 필요한 구조조정 대상으로 변하고 있다. 다만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이기에 뭉그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채무 재조정, 부채 탕감이 그럴 시간을 벌어주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올 들어 지난 8월까지 정부가 대신 갚아준 서민 대출금이 1조원을 넘어섰다. 여기에 이달 초 금융위원회는 '소액 채무 전액 감면' 제도를 발표했다. 기초수급자와 중증장애인이 500만원 이하 채무를 1년 이상 갚지 못하는 경우에는 대출 원금을 모두 깎아준다고 했다.

특히 오는 17일부터는 개인채무자보호법이 발효된다. 한계에 봉착한 채무자가 3000만원 미만의 대출을 내준 금융회사를 상대로 채무조정을 요청할 수 있다.

바야흐로 부채 탕감의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아직은 취약계층, 소액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지만 우리는 안다. 정치인들 마음먹기에 따라 꼬리표는 언제든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건대,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진 채무자를 구제하는 데 찬성한다. 신용불량자, 파산자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재기할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동체뿐 아니라 채권금융기관 입장에서 더 이익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가계부채 탕감이 정치판까지 집어삼킬 괴물로 자라날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불길한 예언의 근거는 간단하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끌어다 쓰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상반기 기준 가계대출자 약 275만명이 연 소득의 70% 이상을 원리금을 갚는 데 쓰고 있다. 157만명은 평균 연 소득의 100% 이상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이들 외에도 대부분의 서민가구가 빚에 고통받고 있다.

매몰차게 들리겠지만 가계부채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데는 부채 탕감에 대한 기대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본다.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다. 공감대는 이미 형성돼 있고, 정치적 영향력으로 결집될 날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한다.

정치인들에게 과다 채무자들은 거대한 표밭이다. 대규모 부채 탕감과 표를 맞바꾸는 정치적 야합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보일 정도다. 이게 현실이 되면 공멸의 난장판이 벌어질 것이다.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사람들에 대한 역차별을 뛰어넘어, 국민을 분열시키고 일할 의욕을 떨어뜨릴 것이다.

이미 정치권은 그 길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가계대출 규제는 정치권 입맛에 오락가락한 지 오래다. 유력한 정치인들이 가계부채 문제를 민생대책으로 거론하고 있다. 아직은 빙빙 돌려 말하지만 방향성은 뚜렷하다. 이미 지난 총선에서 대규모 채무 재조정 공약이 등장하기도 했다.

정부와 금융회사들은 정치가 끼어들기 전에 포퓰리즘이 침투할 틈새를 메워야 한다. 금융당국에만 맡겨놓을 일이 아니다. 범정부적으로 달라붙어도 해결될까 말까다. 집값 등 대출로 틀어막을 수밖에 없는 국민들의 살림살이 구조를 손보는 한편, 결기를 갖고 투기자금 같은 과잉 가계부채부터 잘라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고통받는 경제 주체들을 위한 지원책도 마련돼야겠지만 무임승차를 허용해선 안 된다.

남미에는 국민에게 보조금 퍼주다 망한 나라가 여럿이다. 무분별한 가계부채 탕감도 마찬가지다.

[이진우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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