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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외교비사⑫] "강사들 혜택 좀..." 日 황당 요구에 정부 '당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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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 강사 신분, B에서 A로 올려달라"
면세 등 혜택 외에 별다른 이유 없어
한국인 교사 지위 개선 요구는 '거부'


더팩트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92년 일본 정부가 공보문화원 소속 일어 강사들의 지위를 대사관 행정직원으로 인정해달라며 요청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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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92년 4월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소속 일어 강사 5명 전원을 '대사관 행정직원'으로 인정해달라고 외교부에 요청했다. 당시 일어 강사 3명은 행정직원에 준하는 특별신분증(A)을, 나머지 2명은 전문가에 준하는 특별신분증(B)을 우리 정부로부터 발급받은 상황이었다.

일본 측이 일어 강사의 신분을 모두 A로 격상시켜달라는 이유는 면세 등 혜택 때문이었다. A 신분은 △6개월 이내 차량 1대 구입 시 면세 △6개월간 물품 구입 시 면세 등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반면 B 신분은 이러한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이같은 주장에 어안이 벙벙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혜택'을 더 제공해달라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이참에 일어 강사들의 지위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당시 일어 강사들의 지위는 '공무원'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 출연금으로 출범한 일본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JF)에 '임시 채용'된 것에 불과했다. 또한 이들의 급여는 대부분 한국 학생들의 수업료(65%)로 채워졌다. 나머지(35%)는 JF에서 지급됐다.

외교부는 해외에서 활동 중인 공보문화원 소속 일어 강사의 현황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그 결과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일어 강사에게 신분상 대우나 면세 등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말레이시아와 태국,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들에게 일부 면세 혜택을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일본 측 요구에 따른 것으로 정식 협정이 체결된 건 아니었다.

당시 우리 정부 역시 일본과 관련 협상을 맺지 않았다. 단순히 일본 정부의 요청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일본 측에 "더 이상 일본어 강사들에 대한 신분증 발급과 특권 및 면세를 부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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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는 검토 결과, 새로 부임하는 주한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소속 일어 강사에게 더 이상 신분증을 발급하지 않고 특권 등도 제공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외교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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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일어 강사들이 공무원이 아닌 점 △일본 대사관에 직접 채용되지 않은 점 △급여가 국비가 아닌 한국인들의 수강료에서 비롯되고 있는 점 △대사관 행정업무도 일부 수행하고 있다지만 주 업무가 아닌 점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도 동일한 성격의 일어 강사에게 혜택을 제공하고 있지 않은 점 등 그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 일본 측에 통보했다.

우리 정부의 단호한 조치에 일본 정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본 측은 "최소한 B 신분증을 발급받은 강사들에게만이라도 A 신분증을 제공해달라. 이들은 A 신분증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부임했다"며 "일부 국가에서도 일어 강사에 대해 특권을 제공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이에 정부는 "외교 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근거하지 않은 특권을 그동안 부여했지만 이제는 선진국과 같이 정상화하는 것"이라며 "특권 부여 여부는 접수국이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라고 잘라 말했다.

다만 정부는 B 신분 일어 강사 1명의 차량 구입과 관련한 면세 건은 긍정적으로 조치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 측이 재일교육원의 한국인 교사들에게 '적절한 대우'를 약속한다면 조치를 재검토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당시 재일교육원에서 일하던 한국인 교사 32명은 공무원 신분인 데다, 급여 전부를 우리 정부에서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이들에게 취업 비자를 부여, 비자 취득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이를 매년 갱신해야 하는 불편을 떠넘기고 있었다. 물론 면세 등 특권도 제공하지 않았다.

일본 측은 우리 정부의 제안에 "답변을 유보하겠다"고 밝힌 뒤, 약 2달 뒤인 1992년 6월 "재일교육원 교사들에 대한 대우 개선 대신에 한국 정부의 방침을 따르겠다"고 통보했다. B 신분 일어 강사 2명의 지위가 A 신분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한국인 교사 32명에 대한 우리 정부의 요청은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js8814@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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