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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월)

평일엔 中 교수, 주말엔 우리말학교 교장…10년 넘게 ‘이중 생활’ 이어온 조선족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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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지난달 21일 베이징의 정음우리말학교 교실에서 정신철 교수가 초급반에 다니는 조선족 아이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 교수는 “올해 7월 교장직을 그만뒀지만, 수업이 열리는 토요일이면 여전히 아이들이 눈에 아른거린다”고 말했다. 베이징=김철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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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교수는 10년 넘게 ‘이중 생활’을 해왔다. 평일에는 중국 정부 소속 최대 싱크탱크의 민족학 교수, 주말에는 ‘정음우리말학교’ 설립자이자 교장이다. 이런 ‘양면적인 삶’은 타고났다고 해야 할까. 중국 지린성 출신인 그는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조선족인 동시에 한국인과 뿌리가 같은 한민족이다. 그가 운영하는 정음우리말학교도 해외 다른 한글학교와는 달리, 중국 조선족 학생들을 위한 곳이다. 정 교수는 “똑같은 훈민정음을 쓰긴 하지만 남한의 한국어나 북한의 조선어가 아닌 중국 조선족의 언어를 가르치려고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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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어느 토요일 이른 아침. 등교 시간에 맞춰 주말학교 건물에서 정 교수를 만났다. 7월 교장직에서 물러났지만, 학생도 학부모도 그를 여전히 ‘교장 선생님’이라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10년 넘게 빠짐없이 해왔던 대로 이날도 교실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교장 선생님 앞에 선 아이들은 떠듬떠듬한 말투로 간신히 ‘안녕하세요’라고 답했다. 지각할까 봐 헐레벌떡 뛰어 올라온 한 학생은 정 교수 인사에 무심코 ‘자오상 하오(早上好·중국어 아침 인사)’라 답했다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고는 겸연쩍어했다.

조선족이면 다 한국말이 자연스러울 것이라 여기지만, 자연스레 소통이 가능했던 건 이미 오래전 일이다. 중국 대도시에 사는 조선족 어린 아이들이 한국어로 대화가 가능한 비율은 5~10%에 불과하다.

“일반 외국인을 가르치는 것과 크게 차이 없어요. ‘기역’ ‘니은’부터 다 가르쳐야 해요. 그런데 신기한 건 수준이 똑같은 중국 한족과 조선족 아이들을 함께 가르쳐보면 조선족 아이들이 훨씬 빨리 배우더라고요. (‘훈민정음 DNA’가 있는 게 아닐까요?) 허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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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서점 창고서 학생 6명으로 시작

주말학교의 탄생은 우연한 기회에서 비롯됐다. 2012년 여름 왕징(望京·한국인 밀집 거주지역)의 한 식당에서 만난 한국인 유병수 박사와 뜻이 맞았다. 추진력 좋은 유 박사 덕분에 수년 째 고민해오던 우리말학교 설립이 급물살을 탔다. 같은 해 12월 유 박사가 운영하는 한국책 서점의 창고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서점 고객들에게 전단지를 쥐어주는 게 유일한 홍보였다보니, 개강 첫날 수강생은 4명이 고작이었다. 어차피 창고가 작아 더 받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얼마 뒤 2명이 늘어 총 6명을 데리고 3개월 동안 우리말을 가르쳤다.

“수강생과 학부모들의 반응이 좋았고, 조선족들을 직접 찾아다녔죠. 이듬해인 2013년 3월 30명이 모집됐고, 다른 건물을 빌려 주말학교 형태로 정식 학기를 시작했어요. 정식 개학 1년 만인 2014년 가을에는 111명이 등록했어요. 이후로 해마다 100명이 넘게 다니다 보니 지금까지 정음우리말학교를 거쳐 간 졸업생만 2000명이 넘습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주말학교 운영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워 주말에 비어있는 조선족 단체 회의실이나 사설 학원을 이용했다. 다른 생업에 있는 직장인들이나 학부모 가운데 뜻이 있는 분들이 최소한의 수고비만 받고 교사를 맡아줬다. 학교 설립 몇 해 뒤 조선족 단체를 중심으로 후원회가 만들어졌고, 주중 한국대사관과 재외동포재단의 지원도 이뤄졌다. 한국 유치원용 책을 구해다 쓰던 교재도 재단에서 지원을 받게 되면서 조금씩 숨통이 트였다.

‘정음우리말학교’라는 명칭은 정 교수의 아이디어다. 학교 설립 당시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려면 ‘○○ 한글학교’라고 해야하지 않느냐는 주변 권유가 있었다. 하지만 정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처음부터 ‘한국어를 가르치는 외국어 학원’을 차리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우리 선조들의 언어를 통해 조선족 뿌리를 찾고, 민족 문화를 가르치자는 취지였거든요. 조선족들은 우리말을 ‘조선어’라고 표현하지만, 그렇게 하면 북한말 같은 느낌이 들까봐 고민이 됐죠. 결국 훈민정음의 ‘정음’과 ‘우리말’이란 단어를 붙여쓰기로 했어요. 남한이든 북한이든 조선족이든 ‘우리말’이라고 하면 모두에게 불편부당(不偏不黨)하잖아요.”

● 우리말 지키기 어려워진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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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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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중국 동북지역의 지린(吉林)성 반석현에서 태어난 정 교수는 어린 시절 한글을 열심히 배운 기억이 없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조선족의 97% 이상이 동북3성(헤이룽장성, 지린성, 라오닝성)에 모여 살았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자연스럽게 우리말을 썼다.

하지만 요즘 동북3성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 사는 조선족들은 우리말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옌볜조선족자치주조차 2022년부터 중국어와 한글을 같이 쓸 때는 중국어를 먼저 사용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어린 자녀를 둔 30, 40대 조선족 부모의 경우엔 설령 우리말을 알아듣거나 말할 수 있어도 읽고 쓰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더욱이 일반 한족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우리말은 어렵고 배우기 귀찮은 ‘제2외국어’처럼 느껴지겠죠. 조부모가 함께 살지 않으면 집에서도 우리말을 안 쓰는 조선족들이 많아졌어요.”

중국 사회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당초 마오쩌둥(毛澤東)이 신중국을 건설하고, 옌볜조선족자치주가 설립된 1950년대 이후 중국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펼쳤다. 당시 조선족 학교가 많이 생겨났고, 가오카오(高考·중국 수능)에서 가산점도 줬다. 하지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집권 이후 ‘소수민족의 정체성’보다는 ‘중화민족 공동체’에 방점을 두고 있다.

“중국 헌법이나 정책에는 여전히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켜야한다고 돼 있어요. 하지만 분위기가 달라진 건 사실이죠. 입시 정책만 보더라도 과거엔 조선족 학생들이 국어(중국어) 과목을 한어(漢語)와 조선어를 절반씩 써서 시험을 치렀는데, 최근에 조선어가 제외되어 가고 있어요.”

● “우리말, 조선족 정체성 지키는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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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정신철 교수가 ‘정음우리말학교’ 교실 앞에 서서 학생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이 학교는 학생들이 돌아가며 한복을 입고, 교장선생님과 함께 등교하는 친구들을 맞이한다. 베이징=김철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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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교수가 우리말 교육에 필요성을 느낀 건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족 사회 내에서 위기감이 퍼지기 시작했다. 동북3성에 모여 살던 조선족들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을 따라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조선족이 한중 교류의 첨병 역할을 했지만, 조선족의 결속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정 교수는 1999년 ‘중국 조선족 사회의 변천과 전망’이란 주제로 논문을 쓰기 위해 전역의 조선족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이 때 경험은 정 교수에게 조선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선 우리말 교육 강화가 절실하다는 걸 느끼게 했다.

“다른 중국의 소수민족들은 여전히 같은 지역에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아요. 중국 서남 지방의 다이(傣族)족 거주지를 가보니 젊은 세대들도 마을 밖으로 나오지 않더군요. 자연스럽게 민족 문화를 체득하며 사는 거죠. 회(回)족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지만 종교(이슬람)라는 공통점이 있고요. 하지만 조선족은 사는 지역도 종교도 달라서 언어마저 없어진다면 함께 공유할만한 민족 문화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위기감을 느낀 정 교수는 직접 발 벗고 나섰다. 보고서를 써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등 중국 정부기관에 우리말 학교 설립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별 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결국 정부 인가가 필요 없는 주말학교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1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이후 정음우리말학교를 본 딴 학교들이 베이징이 아닌 다른 도시들에도 생겨나며 2015년 도시우리말학교협의회가 설립됐다. 정 교수가 회장을 맡았고, 각 학교들끼리 정기 교류와 교사 연수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 교수는 왜 이토록 ‘조선족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걸까. 실제로 중국에선 자신이 조선족인 걸 굳이 밝히지 않으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어차피 중국 국적으로 사는데 조선족 정체성을 지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여긴다. 잠시 고민하던 정 교수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답을 내놨다.

“물론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출신을 숨기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인간이라면 언젠가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나의 뿌리가 어디인지 찾기 마련이에요. 단일 민족인 한국은 사정이 좀 다르지만 아직도 경상도·전라도 이렇게 동향(同鄕)을 찾아서 모이고 하잖아요.”

● 단절된 시간만큼 언어도 달라져

언어는 세월의 흐름 속에 변해간다. 서로 단절된 시간만큼 격차는 더 벌어지기 마련이다. 똑같은 훈민정음을 쓰지만 한국어와 우리말(조선족 언어)도 차이가 있다. 하물며 조선족 안에서도 말투가 다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주해온 출신 지역에 따라 옌볜 사투리는 함경도, 단둥 지역은 평안도, 지린성은 경상도 말투와 닮았다.

“한국어와 조선족 언어의 가장 큰 차이는 외래어예요. 한국인들은 외래어가 익숙할지 몰라도 영어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너무 많습니다. 예전에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에 갔을 때 ‘데이트 한번 하자’는 말을 이해 못했대요. 그런데 무작정 ‘까짓거 합시다’라고 답했다가 곤란한 일이 많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어요.”

반대로 조선족은 중국 사회에서 살다 보니 중국어 병음을 차용해 쓰는 경우가 많다. 조선족 대화를 듣다보면 어순도 어미도 우리말인데 한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상당하다. “너 오늘 상반(上班·출근의 중국어 병음)했니” 같은 식이다.

요즘 주말학교를 찾는 일부 조선족 학부모들은 우리말(조선족 언어)이 아니라 한국어에 가깝게 가르쳐달라는 요구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만든 교재를 쓰다보니 조선족 교사들이 오히려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곤혹스러운 적도 있다.

하지만 외래어 표현과 두음법칙에서 차이가 있지만, 결국 같은 자음과 모음을 쓴 같은 ‘우리말’이다. 정 교수는 ‘언어는 민족의 정수가 담겨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담아 정음우리말학교 교가를 직접 작사했다.

“선조들이 남겨 준 지혜로운 우리말, 민족 향기 풍겨가는 빛나는 유산이라네. 우리 모두 열심히 배우고 배워서 온 세상에 우리말 우리글을 꽃피우리.”(정음우리말학교 교가 중에서)“

정신철 교수

△1958년 중국 지린성 반석현 출생
△1983년 옌벤대학교 졸업
△1986년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 졸업
△2000년 중국사회과학원 민족학 교수
△2013년 정음우리말학교 교장
△2013년 중국조선민족사학회장
△2015년 도시우리말학교협의회장



베이징=김철중 특파원 tn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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