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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대한민국 남성성의 위기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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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9월21일 오후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앞 대학로에서 열린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시위: 만든 놈, 판 놈, 본 놈 모조리 처벌하라’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채운 기자 cw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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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올여름 한국의 반성폭력 활동가들을 만났을 때 미국의 ‘인셀’ 현상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인셀은 ‘비자발적 금욕’을 뜻하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다. 하지만 그저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실패한 남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여성들에게 거부당했다고 생각하며 여성혐오를 깊이 내면화한 남성들이다. 많은 경우 사회적으로도 고립된 상태에서 세상과 여성에 대한 분노를 키워간다. 여자들이 나를 거부할 수 없는 세상, 그들은 그런 세상을 꿈꾼다.



당연히 인셀은 남성성의 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상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이를 사회적 위협으로 보고 적극 대응해왔고 관련 연구도 쏟아졌다. 하지만 한국만큼 문제가 심각한 곳이 있을까. 한국의 젠더 인식과 성평등 지수가 전세계에서 바닥이라는 점은 각종 통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차별과 폭력을 체감하는 수준도 다르다. 이제는 한국이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가장 활발하게 생산하는 국가라는 점도, 영상 속 피해자가 대부분 한국 여성이라는 점도 널리 알려졌다. 과연 대한민국의 남성성은 무사한가? 슬프게도 그렇다고 답하기가 어렵다.



첫째, 올해 딥페이크 성범죄로 검거된 피의자의 80%가 10대, 그중 25%는 14살 미만의 촉법소년이었다. 즉, 여성들로부터 반복적으로 성관계를 거부당하며 깊은 증오가 축적될 나이가 아니다. 한국의 아동·청소년들은 그런 나이가 되기도 전에 여성혐오와 성범죄에 빠져들고 있다. 또한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만들고 유통하는 이들은 ‘사회부적응자’이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아니다. 자주 만나던 친구들, 밝게 인사하던 학생들이다. 남성들의 위계에서 바닥에 놓인 채로 여성과 사회에 대한 증오를 키우던 인셀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남성들이 성착취물을 직접 만들고 있다.



둘째, 피해자 역시 익명의 여성 일반이 아니라 친한 친구, 좋아하는 여자, 심지어 가족이다. 전통적 가부장제의 이중 잣대, 즉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이 붕괴되었다는 의미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뒷받침하는 성적 대상화는 엄마, 여동생, 아내와 같은 여성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으로 둔다. 설사 성매매를 함께하며 전우애를 다지는 남성 동지라고 하더라도, 만약 그가 내 여동생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싸움이 붙을 것이다. 하지만 10대들의 딥페이크 세상에서는 이런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이라면 모두 딥페이크로 가지고 놀 수 있으며 심지어 돌려보기까지 한다. 이는 관습적인 가부장으로서의 남성성이 사회화되기도 전에, 여성의 성적 대상화부터 학습했다는 뜻이다. 내 곁에 있는 여자라면 누구든 나의 포르노 세상 속에 존재할 수 있다.



셋째, 이처럼 전방위적인 여성혐오 사상이 디지털 기술과 만나 성폭력이 사소화·자연화되고 있다. 여성 신체의 대상화, 파편화, 성애화가 너무 손쉽게 집단적으로 이뤄지면서, 성적 만족을 위해 누구든 도구화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다. 특히 단순 시청을 넘어 제작에 동참한다는 것은 능동성의 수준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뜻한다. 이들은 주변 여성들의 사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 ‘도장 깨기’를 하면서도 타인의 인격적 존엄을 훼손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각 방마다 수천명의 남자들이 모여 같은 짓을 하는데 왜 나만 잘못인가? 오히려 이 행위는 사회적으로 승인되고 촉진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어른들’은 위기의식이 없는 모양이다. 딥페이크인지 모르고 봤다면 처벌하지 말자는 국회의원, 피해 소녀가 어떤 상태이든 관심 없고 내 아들의 수능시험이 더 중요하다는 학부모, 텔레그램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플랫폼 기업을 규제하면 한국 업체만 손해 본다는 기업인, 포괄적 성교육은 조기 성애화를 부추긴다는 종교인의 발언이 당당하게 전파를 타는 나라다.



대한민국의 남성성은 위기에 빠져 있으며 그 미래는 더욱 암담하다. 정부는 남성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총력전’을 펼쳐야 할 텐데 어쩌면 이렇게 무심할까. 젊은 남성들의 젠더 인식을 바꾸기 위한 교육적 개입이 오늘 당장 시작되어도 그들이 변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만큼 시급한 문제다. 여자들이 나를 거부할 수 없는 세상, 주변의 모든 여성이 성적 도구가 되는 세상, 그들은 그런 세상을 손안에 만들었다. 과연 그 세상이 화면 속에만 머무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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