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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수)

미친 술꾼 ‘말레 베베’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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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프란스 할스, ‘말레 베베’, 1633-1635년, 베를린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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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 거칠고 투박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여성이 보인다. 흰 칼라가 달린 수수한 갈색 드레스는 1630년대 하를럼의 전형적인 여성 의복이다. 그녀의 이름은 '말레 베베(Malle Babbe)', 네덜란드어로 '미친 베베'라는 뜻이다. 본명이 바르바라 클라에스(Barbara Claes)인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에다 정신 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가들은 당대 하를럼 기록 보관소에서 바르바라 클라에스가 이 지역에 실제로 살았던 인물임을 확인했다. 그녀는 하를럼의 구빈원에 수용되었는데, 당시 구빈원은 감옥인 동시에 정신병원이었던 곳이었다. 그녀는 '미친' 여자, 또는 '바보'로 불렸는데. 하를럼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맥주잔 이외에는 그림 속에 별다른 정보가 없어, 그림 속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하를럼의 한 선술집이 아닐까. 말레 베베의 뺨은 이미 술기운으로 붉은빛을 띠었고 입은 크게 벌리고 웃고 있다. 매우 흥겹고 즐거워 보인다. 술집 안 그녀의 맞은 편에 있는 누군가가 저급한 우스갯소리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정신 질환을 가진 그녀가 그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웃는 것일 수도 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뚜껑이 열린 백랍 맥주잔을 잡고 한 잔 더 마시려고 하는 것 같다.

화가는 격식 차린 포즈를 취한 종래의 초상화와는 달리, 인물의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마치 스냅숏처럼 그려낸다. 순간적인 감정을 포착하는 데 매우 능숙했던 할스는 거의 조증에 가까운 광인의 웃는 얼굴을 생생하고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빠르고 거친 붓놀림을 특징으로 하는 할스의 스타일은 그림에 생동감과 즉흥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왜 그녀의 어깨에 올빼미가 앉아 있는 걸까? 그리스 신화에서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상징인 올빼미는 지혜의 표상이지만, 네덜란드에서는 흔히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올빼미처럼 취한'이라는 네덜란드의 속담도 있다. 술을 무절제하게 마시면 바보가 된다는 의미다. 그림 속 올빼미는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말레 베베의 타락과 어리석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어울리고 축하하고 위로하고 슬픔을 달래거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 술이 사람들 간의 긴장과 갈등을 풀어주고 마음의 벽을 허물기도 한다. 그러나 절제를 모르고 마시는 경우, 술은 정신을 잃어버리게 하고 심지어 비이성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고 하게 만든다.

한편, 올빼미는 야행성 동물로서 어둠, 악, 또는 마법을 상징하기도 한다. 할스는 '하를럼의 마녀'라는 별명을 가진 말레 베베의 어두운 광기를 암시하기 위해 어깨에 올빼미를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은 현실과 연결되지 않는 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뭔가 불편하고 음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활짝 웃고 있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정신적 질병의 비극이다. 색채 또한 어둡고 침침한 톤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할스는 그의 아들 피터르(Pieter)도 그녀와 같은 구빈원에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말레 베베를 직접 관찰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화가는 정신질환자의 세계, 혹은 음주의 위험에 대해 목격하고 연구했을지도 모른다.

프란스 할스(Frans Hals)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다. 당대 네덜란드는 역사상 최고의 번영기인 황금시대(Golden Age)를 이룩했다. 암스테르담, 헤이그, 하를럼, 델프트, 위트레흐트, 레이덴 등 도시들은 국제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미술시장이 한창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할스의 작품은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았다. 할스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부유층 초상화뿐 아니라 술주정뱅이, 거지, 광인, 매춘부 등 사회적 아웃사이더들을 그리는 일에도 끊임없는 관심과 흥미를 보였다.

그는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 각각의 개성을 표현해 그들을 생기있고 친근하게 보이게 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한 웃는 인물은 그의 작품의 백미다. 세부 묘사나 마무리 작업에 연연해하지 않는 빠른 붓놀림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할스는 당대 많은 작품 주문을 받은 성공한 화가였지만, 일생 동안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고 1666년 사망 시에도 재산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 황금시대 화가들의 전기를 쓴 화가이자 작가인 아르놀트 하우브라켄(Arnold Houbraken)는 그의 책에서 할스가 게으름뱅이 술꾼이었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할스가 무절제한 음주를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말레 베베와 같이 정신 질환이 있는 알코올 중독자나 술꾼을 그린 그림들로 인해 생겨난 선입견일 것으로 추정된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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