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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화)

내일의 세계는 이들의 세계다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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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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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안녕하세요? 저희가 사는 곳은 전남 곡성이에요. 딸 해용이는 열네살입니다. 청소년글방은 줌으로 만나는 건가요? 그래야 신청할 수 있고요. 제가 텃밭 농사를 짓고 남편은 취미로 카빙도 하고 저는 먹을 빵도 만들고요. 그래서 수업료를 물물교환으로 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여름이 시작되는 초입에 받은 메일이다. 나도 답을 보냈다.



재밌는 제안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제 상황을 알려드려야 물물교환이 가능할지 가늠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저는 1인 가구라 야채 소비량이 아주 적습니다. 대파 한단으로 한달 먹는 수준입니다. 서울은 지인들이 워낙 멀리 살아 야채를 바로 나누기도 좀 애매합니다. 그리고 밀가루를 먹지 않습니다. 즉슨 빵을 먹지 않습니다. 혹시 반찬 종류를 나눠 주신다면 그것은 좋습니다. 반찬을 만들고 보내는 일은 까다로운 일이라 어렵지 싶습니다만 그래도 말씀드려 봅니다. 수업은 줌으로 합니다. 계절에 한번씩 오프라인으로 만나 놀기도 합니다. 물물교환, 흥미로운 제안입니다. 함께 고민해보아요.



답장이 왔다.



네…^^



말줄임표 속에 많은 말이 담겨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메일을 썼다.



곡성에서 같이하면 글방 친구들한테도 좋을 거 같습니다. 수업료는 농산물로 주시고 서로 조율해가면 어떨지요? 저도 편하게 하는 제안이니 해용 부모님도 부담 갖지 마시고 의견 나누어 보면 좋겠습니다.



이리하여 해용이네서 첫 택배가 왔다. 생각보다 양이 많아 살짝 난감했지만 농사지어 멀리서 보낸 정성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알뜰히 먹어야 했다. 오이를 통째로 넣어 오이김밥을 싸 먹고 호박과 양파를 듬뿍 얹은 비빔국수를 해 먹고 단호박과 감자를 양껏 넣어 카레를 끓이고 오이와 토마토, 양파를 다져 타코를 만들어 먹었다. 종종 단골 수선집 사장님과 지인들과도 나누었다. 모두 좋아했다. 깻잎김치, 고추·양파피클, 쌈장, 김장김치가 오기도 했다. 꺼내는데 군침이 나서 담았어요. 저희가 농사지은 배추라 초록잎까지 알뜰하게 먹어요, 라는 엽서와 함께.



비가 많이 오면 오는 대로 가물면 가문 대로 시름이 깊어지지만 호박, 감자, 양파, 깻잎 찌개 끓여 드시면 좋을 거 같아서 담았어요. 밥 지을 때 감자 껍질 깎아서 한개 같이 넣으면 찐 감자가 맛있어요.



요런 엽서를 받을 때면 나 역시 비가 와도 걱정 가물어도 걱정이 함께 됐다. 어제는 단단하게 여문 이쁜 늙은 호박과 노각, 매운 향이 제대로 나는 풋고추와 야무지게 익은 붉은 고추가 도착했다. 가을이 문 앞에 배달된 것이다. 가게에 가서라면 절대로 사지 않을 늙은 호박을 보며 아, 난제로다, 낮게 중얼거렸지만 아마도 호박죽이나 호박떡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해용이 청소년글방에 참여하게 된 과정이다. 청소년글방은 일요일 저녁 7시에 시작한다. 한주를 다 보내고 새로운 한주를 준비하는 시간에 모여 글을 쓰고 발표하고 서로의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청소년글방에는 영암, 파주, 분당, 안양, 서울, 곡성에 사는 청소년들이 참여한다. 코로나가 준 선물이라면 선물이다. 예전 같으면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만 모임을 할 수 있었지만 줌이 활성화된 이후에는 어디에 사는가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어른들이 참여하는 글방에는 런던, 멕시코시티, 베를린, 하노이, 브뤼셀에서도 접속한다. 어떤 일이든 양면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는 지역도 다양하지만 사는 방식도 다양하다. 일반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도 있고 대안학교에 다니는 친구들도 있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친구도 있다. 매일 두세군데의 학원에 다니는 친구도 있고 학원을 한군데도 안 다니는 친구도 있다. 외동도 있고 형제가 많은 친구도 있다. 열명 남짓하지만 다른 환경과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 일요일 밤 심중의 이야기를 꺼내 글로 쓴다.



친구와의 갈등, ‘인싸’가 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현실의 속상함, 반장 선거, 수학이 너무 싫었는데 선생님이 바뀌자 갑자기 재밌어진 사연, 누나를 넘어서고 싶은 마음, 이모부가 돌아가신 날의 기억, 설레거나 떨렸던 순간, 아이돌이 되고 싶은 친구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이야기, 편의점 가려면 버스 타고 30분 가야 하는 우리 동네…. 한시간 남짓 원고지에 글을 쓸 때는 어찌나 집중하는지 화면에 뒤통수만 보일 때도 있다. 글이 잘 나갈 때는 신나게 쓰느라 팔이 아픈지 중간에 툭툭 털기도 한다. 키보드로 많은 걸 해결하는 시대지만 원고지 쓰기를 하면서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살피고, 문장부호에 대해 고민하고, 대화글 쓰기의 규칙을 지키고, 문단 나누기를 해보는 건 두드려 만드는 글과 연필을 쥐고 만드는 글의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글쓰기가 끝나면 한 사람씩 자신의 글을 낭독하는데 다른 사람이 발표하는 글을 들을 때는 모두 쫑긋 귀를 기울인다. 특히 자신의 글에 대한 합평이 진행되면 놀라울 정도로 몰두해서 듣는다. 합평 시간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의 하나는 나도 그런데 너도 그렇구나, 나는 안 그런데 너는 그렇구나, 다. 서로의 공통점에선 위로를 얻고 차별점에선 고유성을 획득한다. 종종 탁월한 글이 나오면 청소년들은 진심으로 감탄한다. 와, ‘넘사벽’이에요. 정말 잘 썼어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글을 쓴 이는 쑥스러워하지만 그 말 덕분에 일주일이 활기찰 것이고, 그 말을 한 사람 역시 좋은 글을 알아보는 안목이 차곡차곡 키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 안목은 자신의 글에 반영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틀림없이.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어딘가로 질주하지만 청소년글방에서 나는 종종 변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서로에 대한 호기심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 단순한 세계를 벗어나 복잡하고 미묘한 세계로 접어들었을 때 겪는 마음의 풍파, 근사한 동료에게 매혹과 질투를 동시에 느끼는 이중나선, 어리고 약한 것들에 어쩐지 사무치는 마음, 어제의 나를 버리고 오늘의 내가 되는 것, 머물지 않고 나아가는 것. 어쩌면 사피엔스가 끝끝내 버리지 않고 애써 간신히 은밀히 전승해준 것들.



내일의 세계는 이들의 세계라는 걸 매주 예감한다. 예측이 빗나가는 어떤 시간이 도래하든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열중하며 어떤 순간에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뻐근하고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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