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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수)

성착취, 포르노, 그리고 딥페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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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8년 6월 ‘불편한 용기’가 주최한 홍익대학교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2차 집회에 참여한 한 여성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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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포르노그래피는 왕권과 종교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무기였다. 계몽사상가들은 군주와 성직자의 성적 능력을 웃음거리로 삼는 야한 소설을 썼는데 지금 읽어도 낯뜨거울 정도로 적나라하다. 역사학자 린 헌트는 당시 포르노가 정치적·철학적 함의를 지닌 ‘계몽주의 문학’의 일부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포르노는 동시에 여성의 신체를 도구로 삼았다. 헌트도 “16~18세기 동안 포르노그래피는 남성들 사이의 결속을 위해 여성의 육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고 인정했다.



포르노는 과학 기술과 공생 관계였다. 19~20세기 초 영화가 발명된 직후 탄생한 초기 포르노들은 짧은 길이의 무성영화 형태를 띠었다. 1970~80년대 초 가정용 비디오카메라가 출시되면서 포르노 산업은 급속히 성장한다. 이즈음 한국에서도 전문 배우의 비디오가 아니라 일반인이 등장하는 비동의 불법촬영물인 ‘몰카’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여자 화장실, 탈의실, 여관, 호텔 등에 카메라 렌즈가 숨어 있었다. 포르노는 그저 성인물 정도가 아니라 온갖 성착취·성범죄물을 포함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1997년, 10대 남녀가 찍은 비디오 ‘빨간 마후라’ 때문에 한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가정용 캠코더로 10대 청소년들이 성관계 장면을 촬영하고 편집해 유통한 것이다. 이 비디오는 서울 전역에서 2만~10만원에 거래되었다. 언론과 경찰은 피해 여중생에게 성적 경험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고 그는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트렸다. 이 비디오를 본뜬 ‘빨간 보자기’ ‘빨간 스카프’ 등 ‘빨간 시리즈’ 비디오가 만들어졌고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인터넷이 등장한 뒤 포르노 생산과 유통은 소자본으로도 가능한 확실한 돈벌이가 되었다. 가해자 특정이 어려워 법적 기소는 복잡했다. 포르노를 소지한 ‘소비자’ 다수가 10대들이었다. 합성 누드사진을 뜻하는 ‘페이크 포르노’도 점점 번져갔다. 합성의 ‘원본’ 이미지에는 유명인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얼굴도 포함되었다.



1999년 문을 연 소라넷은 2016년 폐쇄될 때까지 100만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한 한국 최대의 음란물 사이트였다. 몰카 같은 불법 촬영물, 페이크물, 전 여자친구나 전 배우자에 대한 ‘복수’를 명목으로 성적 촬영물을 공유하는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도 다수였다. 운영자들은 성폭력 범죄를 전시·조장하면서 수백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겼다. 2018년 유일하게 구속된 40대 여성 운영자는 대법원에서 징역 4년이 확정돼 지나치게 관대한 처벌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용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그 뒤 불법촬영물을 유포하는 ‘웰컴투비디오’, ‘웹하드 카르텔’, ‘엔(n)번방’ 사태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처벌받지 않은 소라넷의 후예들’이었다. ‘텔레그램 엔번방’에서는 미성년자를 포함한 다수의 여성 성착취 영상이 공유됐고 ‘인간시장방’에서 피해 여성을 ‘분양’했다. ‘일망타진’은 없었다. 핵폭발이 일어났을 때 낙진에 의한 오염이 수만년을 가듯 한번 업로드된 파일은 영구적이었다. 성적 촬영물 비동의 유포 피해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피해자가 죽은 뒤에도 ‘유작’이라고 말머리가 붙은 동영상이 유포됐다.



‘엔번방의 후예들’은 다시금 신기술을 적용했다. ‘딥페이크 포르노’는 인공지능(AI) 기술로 동의 없이 몸을 합성하는 포르노그래피를 뜻한다. 딥 러닝 알고리즘을 이용해 실제와 차이 없는 음성, 동작, 표정 등 이미지를 좀 더 쉽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 누나, 여동생, 친구, 선생님 등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얼굴을 이용한 이른바 ‘지인 능욕’ 딥페이크 성폭력도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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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페이크 성범죄 아웃 공동행동 회원들이 9월6일 오후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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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은 딥페이크물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가장 심각한 국가로 지목되었다. 보안업체 ‘시큐리티 히어로’의 2023년 현황 보고서를 보면, 9만5820건의 ‘딥페이크 포르노’에 등장하는 대상자 중 99%가 여성, 53%가 한국인으로 가장 많았다. 가장 큰 타깃이 된 한국인 가수는 1595건의 딥페이크물에 등장했고 조회 수는 561만회에 달했다.



한국에서는 ‘딥페이크 성착취/성범죄’, ‘딥페이크 포르노’라는 말을 혼용한다. 영어권에서는 ‘딥페이크 포르노’라는 말이 일반적이다. ‘포르노’라는 말을 반성폭력 운동의 차원에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한국적 맥락에서 자칫 포르노 찬반이라는 전통적 논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특히 겉으로는 ‘음란물’을 규제하고 실제로는 성산업을 방조하거나 개입하며 통치성을 발휘했던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거친 한국 근현대사의 경험 속에서 포르노를 둘러싼 논쟁은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관점 이동이다. ‘포르노’가 아니라 ‘딥페이크’라는 기술의 힘이 어떤 권력을 가진 누구와 접속하느냐의 문제다.



2024년 붙잡힌 딥페이크 성착취물 피의자 84%가 10대 남성이라는 통계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 기술은 규제 없이 너무도 쉽게, 널리 사용되고 허용돼왔다. 지금 유념해야 할 부분은 딥페이크라는 기술이 선진적이고 미래적이며 따라서 산업적인 성장을 가져온다는 허구의 믿음 아래 ‘사회’가 어렵게 보호해온 민주주의의 윤리와 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부지기수의 여자들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줄 것인지 결정할 권리를 잃고 치욕적인 이미지와 낄낄거리는 담론, 성폭력 속에서 몸의 자율성과 인격권을 침해당해왔다. 국민을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조치는 국가만이 할 수 있고, 정부와 입법기관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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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등 세계 각국 출신 여성 약 100명이 9월3일 저녁 영국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 모여 딥페이크 성범죄 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주영 한국대사관 앞으로 행진했다. 리셋(ReSET)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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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전후 페미니즘 대중화의 상징인 “내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라는 구호에서 보듯 딥페이크 기술은 ‘얼굴’ 가진 모든 여성의 일상을 착취하고 폭력에 노출하며 이윤 창출을 할 수 있는 자원으로 삼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60초짜리 딥페이크물 제작에 25분이 채 걸리지 않고 비용은 ‘0’(시큐리티 히어로)인 시대에 실재와 허구의 경계는 무너지고 여성의 몸은 주인인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개·변형되며 상품화한다.



이 새로운 디지털 성폭력의 핵심은 얼굴과 개인정보가 노출되어 인격까지 말살되는 피해자와 달리 가해자들은 익명의 지배적 위치에서 젠더 헤게모니를 행사한다는 점이다.(매튜 홀·제프 헌, ‘리벤지 포르노’ 참고) 피해자들은 ‘지인방’ ‘겹지인방’ 등 다양한 ‘방’에서 조롱과 학대와 공격의 타깃이 되어 심각한 정신적·육체적 타격을 입는다. 피해자는 본인의 신체가 악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도 있지만,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더욱이 피해자 상당수는 10대 초중반 여성이다. 법적 규제 강화는 물론, 기술 기업들의 책임까지 엄중히 물어야 하는 이유다.



여성의 자율성·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오랜 관행과 기술이 만나, 오늘날 디지털 세계를 거점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고 여성과 소수자의 몸을 자원화하면서 젠더 헤게모니를 쥔 ‘디지털 고어 남성성’(손희정)이 탄생했다.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 소유, 통제 욕구가 신기술을 통해 재해석된 형태로서 딥페이크 성착취물은 가부장제 욕망의 최신 버전이다. 절대다수가 여성인 ‘타깃’의 몸을 조각내 가장 비인격적이고 노골적이고 모욕적인 형태로 재배치한 뒤 가장 새로운 상품으로 진열하는 것, 이 재앙적 기술을 사용해 여성 폭력과 학대를 성적 쾌락으로 둔갑시켜 돈벌이를 가능하게 하고 산업화한 것이 바로 이 ‘딥페이크 바디’라는 새로운 신체에 관한 진실이다.



딥페이크 성폭력 문제에 대한 정치적 개입과 법적 규제 노력은 “과잉 규제”(이준석)나 ‘표현의 자유 제한’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저항의 한 형태가 됐다. 이 기술매개적 딥페이크 성착취물 대량 생산은 국가가 추구해야 할 경제 산업적 목표가 될 수 없고, 이성애자 남성이 시각화하는 성적인 여성 몸의 전형 만들기라는 차원도 넘어선다. 사회연결망서비스(SNS)를 통해 누구나 자신의 모습을 공유하고 타인의 사진을 쉽게 소유할 수 있게 된 시대에 딥페이크 성착취물이 디지털 공론장을 지배하게 된다면 이는 ‘포르노 이슈’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해야 한다. 나아가 ‘소비자’ 남성 또한 비인격화, 비시민화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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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1일 오후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앞 대학로에서 열린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시위: 만든 놈, 판 놈, 본 놈 모조리 처벌하라’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채운 기자 cw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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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딥페이크 처벌법’(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논의될 때 가장 논란이 된 단어는 ‘알면서’였다. 법제사법위 전체회의에서 “‘우연히’ 본 것까지 다 처벌해야 하느냐”고 일부 의원이 주장하면서 ‘알면서’라는 단서가 추가된 것이다. 엎치락뒤치락 끝에 이 단서가 삭제된 채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사태가 ‘우연히’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모두가 모르는 건 단 하나다. 우리 ‘몸’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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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 한겨레21 선임기자. 한겨레 편집국 문화부, 편집부, 사회부 기자를 거쳐 책지성팀장과 토요판 부장을 지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문화학을 공부했고 감염병과 주부주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가 있고, ‘엄마도 아프다’ ‘종이약국’을 다른 필자들과 함께 썼다. ‘바디올로지’는 ‘몸’(body)과 ‘학’(-logy)의 합성어로, 지난 100년 동안 미디어를 통해 유포된 몸 담론을 씨앗으로 전쟁터나 다름없는 몸과 젠더, 장애, 노화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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