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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화)

[단독]“평생 못 본 아빠 대신 내라구요?”···상속포기해도 계속되는 응급실 의료비 대납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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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응급의료비 미수금 대지급제도에 따라 응급실 진료비가 가족 중 일부에게 청구되기도 하는데, 상속포기를 해도 채무처럼 따라붙는 경우가 있어 문제다. 사진은 서울의 한 대형병원 응급실 모습. 사진|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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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평생 동안 아빠라고 한 번 불러보지도 않았고, 저에게 도움 한 번 주지도 않았던 사람의 병원비를 왜 제가 내야 하나요?”

A씨는 성인이 될 때까지 할아버지와 함께 자랐다. 호적상으로는 부모가 있었지만 A씨 곁을 지키며 길러준 것은 할아버지 뿐이었다. 성인이 된 후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지난해 3월 아버지가 사망한 후 A씨는 아버지의 빚을 상속받지 않기 위해 빠르게 상속포기 절차를 진행했다.

그런데 지난해 8월 A씨 앞으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아버지가 사망 전인 2020년 6월에 응급실을 이용하고 내지 못한 의료비 58만원 가량을 A씨가 대신 내야 한다는 통지였다. A씨는 문자를 보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전화해 “2020년에는 아버지와 연락이 닿지도 않았고, 상속포기 절차도 다 진행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몇 차례 문의마다 돌아온 답은 “응급실 의료비 대납은 상속포기와는 별도의 법이 적용되니, 가족인 A씨가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A씨는 “누군가에게는 작은 돈일 수 있지만, 상속포기를 했음에도 내야할 의무가 있다고 하는 것이 억울하고 화가 났다”고 말했다.

정부가 응급실 의료비를 내지 못한 환자의 비용을 일단 내주고, 추후 본인과 가족들에게 의료비를 청구하는 ‘응급의료비 미수금 대지급제도’가 가족관계가 오랫동안 단절됐거나 상속포기를 한 사람들에게까지 일괄 적용되고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심평원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응급의료비 미수금 대지급제도’와 관련된 민원이 매년 20~30건씩 발생했다. 국민신문고를 통해 들어온 민원 내용을 보면,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해 20년 넘게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어머니의 응급실 치료비 600만원을 친권이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내라는 통지를 받은 20대 청년의 사례도 있었다.

이같은 사례가 발생하는 이유는 징수기관에서 관련 법령에 따라 응급실 의료비는 국가 채무가 아니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응급의료비 미수급 대지급제도’에서 정한 상환의무자는 환자 본인과 그 배우자, 1촌 이내의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 등이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라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하더라도 가족의 의료비 지불 의무는 살아있다고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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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5년간 대지급금 청구 현황을 보면, 청구건수는 감소했지만 건당 금액은 증가 추세다. 2019년 1만5722건이던 청구건수는 2024년(1~9월)에는 6329건으로 줄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청구금액이 140억9100만원에서 212억200만원으로 늘어나면서 건당 청구금액도 89만6260원에서 334만9976원으로 3.7배 증가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지불 능력이 없는 상환의무자로부터는 의료비를 회수하지 않고 결손처리를 하는 등 무리하게 징수는 하지 않고 있다”면서 “하지만 미처 본인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다면,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보고 의견을 청취하겠다”고 말했다. 복지부 설명대로 소득과 재산기준을 따져 상환의무자를 거르면, 2024년 9월 기준으로 전체 미상환자(1만7481건)의 3.9%(677건)만이 의료비 청구 대상이 된다.

소병훈 의원은 “국고가 들어간 사업의 미상환율을 제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료 취약계층을 구제하기 위한 사업이 외려 취약계층과 그 가족들까지 힘들게 하고 있다면 목적에 맞게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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