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슈퍼컴퓨터 시대를 연 슈퍼컴퓨터 1호기인 크레이 2S 모습.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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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슈퍼컴퓨터 시대가 열렸다. 5년 만의 값진 성취였다.
1988년 12월 6일 오후 4시 서울 동대문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설 시스템공학센터(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는 국내 처음으로 '슈퍼컴퓨터 2S'의 가동식을 개최했다. 슈퍼컴퓨터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첫 행사였다.
가동식에는 이상희 과학기술처 장관, 전학제 한국과학기술원장, 성기수 시스템공학센터 소장, 청와대 홍성원 경제비서관 등 산업계·과기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슈퍼컴퓨터 시대 개막을 축하했다.
가동을 시작한 슈퍼컴퓨터는 미국 크레이에서 도입한 '크레이 2S'였다. 초당 20억번의 부동소수점 처리 능력을 갖춘 당대 최고 성능의 컴퓨터였다.
슈퍼컴퓨터 도입은 과학기술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이 일에는 한국컴퓨터 산업의 대부로 불리는 성기수 소장이 앞장을 섰다. 성기수 소장은 과학기술처와 언론매체를 통해 슈퍼컴퓨터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시스템공학센터는 1980년대 초부터 슈퍼컴퓨터 도입과 운영, 기술적 타당성을 검토했다. 성 소장은 직원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국이 선진국과 과학기술 경쟁에서 이기려면 강력한 무기, 즉 슈퍼컴퓨터를 도입해야 합니다.”
당시 한국 기업이나 연구기관들은 반도체·자동차 기술 예측이나 설계 시 국내 슈퍼컴퓨터가 없어서 외국으로 나가야 했다.
과학기술처는 1983년부터 슈퍼컴퓨터 도입을 위해 경제기획원에 예산을 신청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들이켰다.
1986년 들어와 최영환 기술정책실장 주선으로 한국과학재단에서 연구비 700만원을 지원 받아 '슈퍼컴퓨터 도입의 경제적 타당성 분석 연구'를 국내 처음으로 진행했다.
연구책임자는 안문석 고려대 교수, 부책임자는 양영규 시스템공학센터 연구실장이었다. 공학센터 연구원, 해외 초빙 연구원, 자문연구원 등 8명이 연구에 참여했다.
연구팀은 슈퍼컴퓨터 수요 분석과 기종별 이용 현황, 설문조사, 전문가 회의, 국내 수요 분석과 비용 분석, 운영 분석, 도입 방안 분석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최종 보고서를 1986년 8월 17일 한국과학재단에 제출했다.
연구팀은 최종 보고서에서 “슈퍼컴퓨터를 서둘러 도입하고 이를 운영할 기구의 지정이 시급하다”면서 “슈퍼컴퓨터는 과학기술처와 문교부, 상공부, 체신부 등 여러 부처 업무와 관련이 있으므로 실무위원회를 구성해서 운영하고 슈퍼컴퓨터에 대한 연구비 지원과 민간 수탁업무 처리를 허용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다.
이런 가운데 슈퍼컴퓨터 도입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왔다. 1987년 대미 무역 수지 흑자가 급증하자 정부는 대미 통상마찰을 완화하기 위해 경제정책을 급선회했다. 당시 한국은 100억달러의 대미 무역 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미국은 무역불균형 해소를 위해 한국에 특정 분야의 미국 제품 구매를 요구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슈퍼컴퓨터였다.
성기수 소장의 회고. “미국의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 제품 구매 압력이 높아지자 청와대를 비롯해 경제기획원, 과학기술처 등 관계기관에서 1987년 대미 무역 수지 흑자에 따른 구매 품목으로 슈퍼컴퓨터를 도입키로 결정했습니다. 초기에는 1000만달러 규모의 중형급 모델을 검토했지만 시스템공학센터와의 협의 과정에서 2000만달러로 확대했습니다.”
과학기술처는 1987년 슈퍼컴퓨터 도입 기종 선정과 준비를 위해 슈퍼컴퓨터 도입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직은 성기수 소장이 맡았다. 이를 지원할 실무위원회도 구성해 본격적인 도입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과학기술처는 슈퍼컴퓨터 도입에 대한 전문가 자문위원회도 구성했다. 위원장은 전무식 KAIST 교수였다.
기종도입추천위원회는 슈퍼컴퓨터 제작사인 크레이와 ETA 등에 제안 안내서와 테스트 프로그램을 함께 보냈다. 성기수 소장이 직접 만든 테스트 프로그램은 연산 속도만 측정하는 기존 프로그램과 달리 컴퓨터 메모리와 처리시간, 결과 정확성 등을 측정할 수 있는 신제품이었다. 이 제품은 크레이가 확인하지 못한 크레이 2S 버그까지 잡아내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앙영규 당시 시스템공학센터 연구실장의 증언. “이 프로그램은 성 소장의 성을 따 SUNG(성)-1, SUNG-2 프로그램으로 불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크레이가 못 찾아낸 버그까지 잡아냄으로써 유명한 프로그램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1987년 10월 크레이와 ETA가 각각 제안서를 보내왔다. 두 업체가 도입 기종을 놓고 최종 경합을 했다.
1988년 11월 성기수 소장과 김문현 박사, 양영규 박사, 박창순 등 4명으로 현장답사팀을 구성해서 2주 일정으로 크레이와 ETA를 방문했다.
답사팀은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현지에서 강행군을 하며 제품 성능 등을 확인했다.
크레이에서는 세계적인 컴퓨터 설계공학도인 시모어 크레이로부터 약 1시간 동안 슈퍼컴퓨터 개발 현황과 앞으로의 기술 발달 추세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답사팀은 이어 ETA를 방문했다. 그런데 ETA-10을 설치한 컴퓨터센터에 가 보니 사용자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2000만달러 이상인 고가 장비를 설치한 곳이라면 사용자들로 붐비는 게 정상이었다. 이를 그냥 넘길 답사팀이 아니었다. 담당자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이용자가 보이지 않는데 왜 그렇습니까.”
“아직 운용체계(OS)를 완성하지 못해서 대형 슈퍼컴퓨터에 터미널 4대만 연결해 계속 시험하고 있습니다.” 현장에 가지 않았다면 확인하지 못할 일이었다. 답은 현장에 있었다.
과학기술처는 기종 선정을 위해 1988년 초 학계·연구계·산업계 대표 등으로 슈퍼컴퓨터 기종선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직은 경상현 당시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이 맡았다. 위원으로는 성기수 소장, 안문석 교수, 전무식 교수, 이동규 서울대 교수, 최병호 성균관대 교수, 강인구 금성반도체연구소장, 이용태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박성득 체신부 통신정책국장, 전윤철 경제기획원 예산심의관, 정홍식 청와대 경제비서관 등이었다.
기종선정위원회는 2개월여의 치열한 토론 끝에 3월 초 성능 평가와 현지 답사 결과 테스트 프로그램 결과를 종합, 최종 기종으로 크레이 2S를 선정하고 정부에 크레이 2S 구입을 건의했다.
과학기술처는 슈퍼컴퓨터 기종선정위원회 제안을 경제장관회의에 상정해서 보고하고 전자계산조직도입조정위원회와 전산망조정위원회 심의를 거쳐 5월 17일 도입 기종을 크레이 2S로 최종 결정했다.
그해 8월 19일 크레이 2S가 항공기편으로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크레이는 도착 즉시 서울 홍릉에 있는 시스템공학센터로 이동했다.
크레이 2S는 국빈급 경호를 받았다. 슈퍼컴퓨터를 실은 차량 앞뒤로 경찰 차량이 삼엄하게 호위했다. 컴퓨터에 무리가 없도록 시속 40㎞를 유지했다.
슈퍼컴퓨터는 시스템공학센터 컴퓨터실에 설치했다. 4개월여 설치와 시험운영을 거쳐 12월 6일 국내 최초로 첫 가동에 들어갔다.
크레이 2S는 각 분야에서 맹활약했다. 국내 대학·국공립연구소·기업체 등 60여곳이 크레이 2S를 이용해 기초과학 연구와 항공기 부품설계, 기상예보, 석유탐사, 자동차 설계, 신약 개발, 원자력 발전소 안정성 분석 등에서 지대한 역할을 냈다.
이듬해인 1989년 9월 태풍 '베라'의 경로를 정확하게 예측, 인명과 재산피해를 최소화했다. 또 3차원 기반의 한반도 지도를 제작해 국토종합개발과 군 전략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과학기술 발전에 큰 역할을 한 크레이 2S도 물러날 날이 왔다. 신기술 앞에 영원한 강자는 없었다. 크레이 2S는 1993년 11월 슈퍼컴퓨터 2호인 크레이 C90과 배턴터치를 하고 퇴역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은 1층 현관 로비에 크레이 2S 모형을 진열했다. 크레이 2S는 국립중앙과학관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크레이 2S는 과학기술의 새 장을 연 첫 슈퍼컴퓨터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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